참여학생수기

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秦昰旅行記(사학과14 박진하)

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秦昰旅行記(사학과14 박진하)

秦昰旅行記(사학과14 박진하)

진이라는 나라는 오랜 기간 나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우리나라의 고대국가도 아닌 중국의 고대 국가가 나에게 감동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처음 진을 알았던 그 때부터 진의 이야기라면 눈이 가고 시황제의 이야기라면 귀가 갔다. 그래서 이번 하계 해외현장학습의 목적지가 진시황제의 ‘서안’임을 알았을 때 나는 안 갈수가 없는 마음이 되었다. 현장학습이 끝나면 진에 대한 감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현장학습을 기다렸다. 현장학습이 가까워질수록 직접 진시황을 마주치는 것 같은 기대감도 천천히 커져갔다.

이번 하계 현장학습에서 다룬 진의 유적은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그리고 진시황의 지하궁전이다. 출발하기 전 먼저 둘러볼 유적과 박물관 등을 설명하는 책자를 현장학습에 참여하는 인원이 제작하였다. 내가 현장학습에 참여한 목적이 진시황릉에 가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책자에 실린 내 글 역시 진시황릉과 지하궁전에 대한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 나는 내가 오랜 기간 관심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이미 아는 것을 바탕으로 즐겁게 글을 쓸 것이라 생각했고 자료 또한 많아서 수월하게 글을 완성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즐겁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이었으며, 진시황릉에 대한 연구는 병마용갱을 제외하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서 자료도 많지 않았다. 심지어 능의 크기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능의 크기를 추측하는 글을 보았을 땐 과연 글을 완성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완성된 글의 내용은 지금까지의 연구보다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지하궁전의 모습과 진시황제에 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쓰면서 자꾸 억울한 마음과 함께 중국이 진시황릉의 연구를 아직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글을 완성하고 나서도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아 이에 대해 알아보는 중 느린 진시황릉의 연구의 진행이 서안의 기술력 부족 때문이라고 하는 글을 보았다. 아마 진시황릉은 중국의 소중한 보물단지와 같아서 쉬이 뚜껑을 열어보지 못 하나 보다. 그리고 지금 파헤쳐서 제대로 연구를 못 하는 것보다 미래의 더 발전된 기술로 발굴을 하는 것이 진시황릉을 연구하는 것에 있어서는 더 좋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는 진시황릉에 관한 발굴이 많이 진행되어서 나중엔 진시황릉을 직접 들어가보고 싶다.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지하궁전의 방문은 중국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한국보다 훨씬 더운 날씨에 잠도 부족했지만 어서 빨리 병마용을, 그리고 진시황을 만나고 싶었다. 오전의 일정을 끝내고 드디어 나는 「사기」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는 지하궁전에 발을 딛었다.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의 지하궁전에는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과 화살, 강과 산, 별과 달 그리고 꺼지지 않는 초가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지하를 깊게 파내는 것도 어려운데 그 안에 강과 산을 만들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을 말 그대로 궁전처럼 만든 것은 죽음 후의 세계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어서도 ‘황제’로 남기 위해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는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서 머물 곳을 화려하게 짓는다면 죽어서도 황제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자본과 많은 노동을 투입하여 몇천년이 넘은 지금도 경탄이 나오는 무덤을 만든 것이 아닐까.

진시황의 내세관을 생각해보며 나는 지하에 축조된 지하궁전으로 들어갔다. 지하궁전으로 이어진 복도의 그림들은 나를 정말로 진시황의 지하궁전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지하궁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지하의 탁 트인 공간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높은 산과 하늘에 박혀있는 별이었다. 그리고 바다와 강으로 보이는 모형 한 가운데에 산의 높이에 다다르게 놓여진 관은 이 지하궁전의 주인공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실 기대에 못 미치는 완성도를 보이는 지하궁전이었지만 그래도 「사기」의 내용은 거의 표현된 것 같았다.

지하궁전을 뒤로하고 진시황릉 중 그나마 발굴이 많이 이루어진 병마용갱으로 향했다. 사실 가장 가장 많이 기대했던 곳이 바로 병마용갱이었다. 진시황릉의 유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병마용이기도 하며 심지어 서안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것 역시 병마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착한 순간부터 계속 병마용을 생각했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언제 병마용을 갈지, 이동을 하면서도 병마용의 순서는 아직 멀었는지 계속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서인지 마침내 병마용갱으로 가는 때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병마용은 무덤부장품의 일종으로 흙으로 빚은 인형이다. 원래 고대에 있던 장례풍습인 ‘순장’은 죽은 자를 위하여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시종들을 무덤에 함께 묻는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의 무덤은 사람을 직접 묻지 않고 대신 흙인형을 묻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다 고대엔 노동력이 귀중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묻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진시황의 사후를 위한 병마인 병마용은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개수가 매장되어 있다. 갱의 개수도 여러개이며 그 갱마다 배치된 병마용의 기능 역시 다양하다. 병마용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왔다. 특히 나는 병마용의 얼굴 생김새가 일치하는 것이 없으며 크기조차 일반인에 비해 크다는 사실 때문에 병마용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었다. 어떤 방식으로 병마용을 만들었을지 상상하며 병마용갱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1호갱에 들어갔다. 바깥에서 본 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굉장히 넓었다. 그리고 수많은 병마용들이 보였다. 정말 그 광경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직접 보니 더 거대했던 병마용들이 모두 한 방향을 보고 대열을 갖추어 서있는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웅장하며 엄숙해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한동안 말을 잃고 넋놓아 바라보기만 하였다. 함께 동행하였던 이성원 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병마용들은 머리와 몸, 팔과 다리를 따로 구운 후 마지막에 몸통에 나머지를 끼워넣어 완성한다고 한다. 또, 몇몇 병마용들을 보면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처음엔 색색의 병마용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교수님의 설명을 따라 병마용들의 이모저모를 보던 중 다른 병마용과 달리 팔의 비율이 조금 이상한 병마용을 발견하였다. 교수님은 과거 진시황의 병마용들을 만들 때 장인들이 주로 병마용을 만들었겠지만 장인들만 만들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아 일반인의 손을 빌렸을 것이라고 하며 그 병마용에 대해 설명하셨다. 병마용이 전시된 양쪽 길로 이동하며 아직 복원되지 않은 병마용들도 보고 각자 맡은 것이 달라 옷의 생김새도 다른 점도 확인하며 1호갱을 나왔다.

3호갱에는 지금까지 보았던 병사들이 아닌 지도자 계급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병마용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회의하는 듯 서로 마주보고 서있기도 했고, 중심이 되는 병마용을 호위하듯 서있기도 하였다. 이 곳은 1호갱처럼 공격적인 분위기가 아니라서 군대의 긴장감은 덜하였다. 하지만 무언가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가 갱 내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3호개은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관람을 마쳤다.

다음으로 간 2호갱은 특수한 임무를 가진 병마용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특히 2호갱에서 발굴된 궤사용은 보존 상태가 좋은 것 등의 이유로 장군용과 함께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궁수용을 기대하며 2호갱으로 갔다. 2호갱은 1호갱의 병마용과 다르게 생긴 병마용이 많았다. 잔뜩 부서진 병마용들이나 완성된 병마용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동물들처럼 보이는 용들도 많았다. 2호갱에서 특히 신기했던 건 나무가 돌로 변한 것이었다. 처음엔 그냥 벽인줄 알았던 것이 과거엔 나무였고, 또 그 안에는 병마용이나 다른 흙인형들이 있을 것이라는 게 정말 신기했다. 직접 내려가서 만져보며 나무의 결이 남아있는 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한게 아쉬웠다. 2호갱을 쭉 들어가면 완성도가 높고 흔치 않은 병마용들을 따로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다. 그 곳에는 장군용과 궤사용을 비롯하여 기마병, 독특한 자세의 병사용이 있었다. 이 전시장을 처음 갔을땐 그 정교함에 한 번 놀라고, 그 크기에 다시 놀랐다. 분명 1호갱에서 병마용의 전부를 확인한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감동이 더 물밀 듯 밀려왔다. 특히 장군용은 사진으로도 많이 보았고, 길거리에서 장식품으로도 많이 보았는데 실물을 직접 보니 잠시 말을 잃을 정도였다. 흙인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품에 나는 병마용을 제작한 장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다. 한동안 그 장군용을 감상하다 이어서 궁을 쏠 준비를 하는 자세의 궤사용, 말과 함께 있는 기마병 등을 보고 2호갱을 빠져나왔다.

2호갱의 지하에는 청동마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청동마차는 두 개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진시황이 실제로 타고 다니던 마차를 만든 것이다. 진시황은 상황에 따라 마차를 바꿔 탔으며 이 두 개의 마차 중 뒤쪽에 있는 마차에서 진시황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마차와 말들, 마부는 흙으로 만들어진 병마용처럼 크기가 크진 않았지만 섬세한 것은 같았다. 특히 나는 진시황이 죽었을 것이라는 청동마차가 유독 눈에 들어와 한참을 감상하였다. 어둠 속에 전시된 청동마차. 지하의 모든 빛은 청동마차를 향해 비춰졌다. 그 빛의 가운데에 있는 청동마차는 몇 천년이 지나 많이 녹슬어 있었다. 청동마차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닫혀져 있었는데, 녹슬었기에 조금만 건들면 열릴테지만 나는 그 문이 꽉 닫혀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꽉 닫혀진 문, 그 안에서 누군가가 밖을 내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그 곳에서 진시황이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고 들었기 때문일까,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2호갱까지 감상한 후 우리는 마지막으로 진시황릉의 중심이라고 추정되는 언덕으로 갔다. 진시황릉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그곳에 관이 있는 지는 알수가 없으며 언덕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산에 가깝다. 과거에는 이 진시황릉을 오를 수 있었지만 2010년부턴 금지되었다고 한다. 오르지 못 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무덤을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게 느껴졌다. 우리는 진시황릉에 도착해서 작은 자동차를 타고 진시황릉 주변을 크게 한바퀴 돌았다. 초록 나무로 우거진 진시황릉은 산과 흡사하게 생겨서 진시황릉이 맞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손에 잡힐 듯 가까워 금방이라도 그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전히 우리는 진시황릉에 대해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아 조금 아득하게 느껴졌다. 길지 않은 진시황릉의 감상을 마지막으로 진시황과의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진시황의 무덤, 진시황의 병사들은 세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축조물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특히 진시황릉은 아직도 발굴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그 감탄이 몇 배로 커질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뜻깊은 유적인 진시황릉의 주체는 흔히 진시황이라고 여겨진다. 나 역시 과거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시황릉을 보는 것은 진시황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시황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진시황릉을 직접 확인하고 마음 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진시황을 향한 감동이 아니었다. 진시황이 아닌 진시황릉을 축조한 진의 백성들에 대한 감동이었다. 현장학습이 진행될수록 나는 진시황보다는 진의 백성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비율이 잘 맞지 않은 병마용, 모두 다른 병마용들의 생김새, 상상조차 안 되는 지하궁전의 모습……. 그들의 노력이 진시황릉의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렇다, 진시황릉은 진시황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진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직접 진시황릉을 보고 나서야 그것을 피부로 마음으로 느꼈다. 비록 그들은 강제로 동원되었던 것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진시황릉은 그들의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매우 큰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이번 현장학습으로 느낀 감동, 그리고 경외감은 그들이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진시황릉을 간다면 그때는 처음부터 그들을 염두하며 진시황릉을 감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