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학생수기

코어사업단의 국내,해외 인턴 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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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 MICE에서의 인턴생활(행정학과 배신선)

안녕하세요, 행정학과 배신선입니다.

상해한국상회(한국인회)에서 인턴을 하고 있던 중에 코어사업단 프로그램을 통해 평소에 관심 있었던 MICE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직원처럼 많은 책임을 맡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한국에서 인턴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단순 업무가 아니라 직접 기획도 하고 미팅도 진행하는 등 더 자율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진이 많이 없어서 상해한국상회 인턴 생활을 포함하여 약 8개월간의 상해 생활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사진1>과 <사진2>는 저희 사무실 사진입니다. 회사가 설립된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세련된 건물에 깔끔해요! 물론 자리는 깔끔하지 않긴 하지만 :)

2개월 동안 홍보 책자 제작하느라 꽤 힘들었지만, 마무리 짓고 오게 되어 기뻤어요.

<사진3>은 상해에 혼자 있으면서 미래에셋 경제교실에서 보조교사로 봉사활동을 진행했던 사진이에요. 아이들뿐만 아니라 같이 진행했던 보조교사들도 재미있게 경제 관련 게임을 했었어요.

그리고 상해 패션 위크 때 동물 탈을 쓰고 퍼포먼스도 했습니다. 패션 관련 직장인들이 만든 스터디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굉장히 열정 있으신 분들이라 즐거웠고, 상해에서 직장 생활에 대한 조언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 사진을 찍었습니다. 동물 탈을 쓰고 있어서 자신감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사진4>와 <사진5>

마지막으로 상해한국상회(한국인회) 사진 보여드립니다. 24대 회장 선거 이후에 받았던 꽃들을 페트병에 꽂아놨던 사진이에요. 상해로 해외 인턴을 오셨을 때 문제가 생기면 상회로 연락해보시면 괜찮을 거예요.<사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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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 it’s skin에서의 인턴생활(중문과 전하형)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 15학번 전하형입니다.

저는 이번 여름 코어사업단 해외인턴 프로그램을 통하여 상해에서 7월 3일부터 8월 25일까지 인턴을 하였습니다. 제가 일했던 회사는 한국 화장품 회사인 it’s skin입니다. it‘s skin은 올해 3월에 중국 상해에 진출하여 항저우에 지사를 두었으며, 9월 중국의 홈쇼핑을 통하여 정식출범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초기 세럼 작업을 하는 과정이어서 인원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영업부, 기획부, 제정부 등 다양한 부서의 일을 배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부서의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에 대하여 방향성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익히고, 적응해가며 다양한 부서의 경험은 앞으로 있을 취업에 대해 어떠한 분야로 일하고 싶은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턴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 많은 일을 처리했지만, 제가 진행했던 일 중 크게 세 가지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중국의 판매 사이트인 쥐메이, 타오바오, 티몰과 같은 해외직구 사이트에서 채널별로 it’s skin 상품이 얼마의 가격에 팔리는지 가격 비딩을 진행하였습니다. 원가와 비교하여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하여 PPT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만든 PPT는 한국 본사의 미팅에서 발표 자료에 사용되었으며 앞으로 있을 T-mall과의 수권에 관련한 미팅에서도 사용되어 질것이라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단상자, 용기 문안 정리를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파는 한국제품의 화장품들은 단상자나 용기에 중국어로 화장품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과정에서 오류를 확인하고, 통일되지 않는 문구를 찾아 통일성을 가질 수 있도록 오류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단상자와 용기 문안에 통일성을 갖도록 하는 이유는 각 제품마다 똑같은 문장을 제품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정확성과 중국어능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기에 더욱 책임감을 갖고 꼼꼼하게 진행하였던 일이였습니다.

세 번째로는 월별프로모션 진행이었습니다. 인턴이 끝나갈 때쯤에 맞게 된 일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제가 프로모션을 계획하지는 못하였습니다. 9월 중국의 홈쇼핑을 통해 중국에 정식출범을 할 예정이었고, 2018년 1월 중국에서 매장 첫 오픈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정식출범에서 중국인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프로모션을 진행을 하여야 했습니다. 곧 인턴생활이 끝나고 귀국을 해야 했기 때문에, it’s skin 경쟁사인 에뛰드, 중국에서 이미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니스프리의 중국에서 최근 5년 동안 진행한 프로모션들을 정리하여 참고자료로 보내드렸습니다. 저의 생각과 앞으로 진행했으면 하는 프로모션들도 간단하게 작성하여 보내드렸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제가 계획한 프로모션으로 중국에서 제품들이 판매된다면 더욱 좋겠지만,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필요한 자료와 몇 가지 프로모션을 제안하는 정도로만 진행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창고정리, 명함정리, 중국 내 선호 화장품 자료수집, 마케팅 자료 수집 등 다양한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회사의 분위기와 내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사는 모회사인 한불화장품과 자회사인 네오팜, 잇츠스킨이 사무실은 다르지만 통로로 연결되어 있어, 월요일마다 세 회사가 다 같이 회의를 하고, 같이 회식을 하며 같은 회사처럼 생활하였습니다. 회사의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회사분들 모두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보이는 열정적인 회사였습니다. 월요일마다 늘 회사분들과 다 같이 밥 먹는 날이어서 항상 이사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회사분들도 너무 친절하시고 상냥하셔서 인턴인 저도 항상 막둥이라 부르시며 잘 챙겨주셔서 회사에 빠르게 적응하고, 업무도 잘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it’s skin 인턴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이사님과 차장님 대리님께서 면접을 보았습니다. 그 때 이사님께서 인턴이라고 허드렛일 시키지 않는다고,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온 만큼 직원이라 생각하고 똑같이 일 배정해 주겠다고 하셨고, 저에게 본사 PPT 발표자료, 가격비딩, 월별 프로모션, 베이안작성 등 직원분들이 하시는 일을 똑같이 맡겨 주셨습니다. 직원분들과 똑같이 대해 주셨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배워갈 수 있었고, 일을 하면서 회사가 어떻게 경영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익을 내려고 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많이 보고, 경험하는 것이 배우는 것이라며 네오팜 이사님과 함께 백화박람회, 티몰 친목세미나, 알리바바 본사 미팅에 참석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좁았던 저의 시야를 넓힐 수 있었으며, 다양한 업계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저의 가치관과 생각도 많이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기업 취업에 관심이 있었기에 티몰과 알리바바 미팅 참석은 저에게 너무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해외인턴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과 上海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상해에서 생활은 어학연수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외국에서 혼자서 해결해야 될 문제(보증금, 주숙 등기, 전기세 등)도 많았고,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과 처음 경험해보는 회사라는 문화에 적응하는데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익숙해지고 난 후에는 상해라는 낯선 도시를 주말이나마 즐길 수 있었고, 회사라는 처음 경험해보는 기업문화는 어색하지만 설렜고, 내가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에는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가기 아쉬웠습니다. 그만큼 저한테는 재밌고, 설렜던 경험이었습니다.

 

해외인턴 프로그램을 고민 중인 후배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프로그램입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던 직접 부딪히며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본 프로그램을 통해 내년이면 있을 취업에서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지 정확한 방향을 가질 수 있었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스스로 회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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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에서의 인턴십(중문과-조채은)

안녕하십니까?

저는 상하이에서 인턴생활을 하며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중어중문학과 조채은입니다. 무더운 여름에 시작되었던 저의 인턴생활이 어느덧 8주라는 시간이 흘러, 벌써 1/2을 채웠고, 상하이에는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인턴실습을 하고 있는 곳은 상해 글로리제이 투자 유한회사 (上海GloryJ投资有限公司)의 경영지원부서입니다.

회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에게 규범화된 세무회계 서비스 제공을 바탕으로 우수 기업에 대하여서는 상하이 장외주식 상장을 진행시키고 유력 투자기관을 연결해주는 일을 합니다.

크게 장외상장과 회계세무컨설팅, 기업개편의 업무 세 가지를 중점으로 업무가 진행됩니다. 이에 따라서 세무회계팀, 법인 설립팀, 장외주식상장&융자팀, 재무팀 네 가지 부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하는 업무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첫 번째로 기본적으로 매일하는 홍보 업무입니다. 회사 공식사이트에 그 전 인턴생의 인수인계를 따라 매일 2-3개씩의 포스팅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포스팅 하는 글은 회사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외상장이나 중국 세무회계에 관한 전문가의 칼럼이 있고, 그밖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콘텐츠를 새롭게 개발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매일 포스팅 할 것들을 검색하고, 글을 쓰는 것을 통해 저도 새로 알아가는 지식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미팅기록입니다. 투자회사이니만큼 많은 고객기업이 상담을 하고자 찾아오거나, 직접 고객기업으로 찾아가야할 때가 많습니다. 한 시간에서 길게는 세 시간동안 진행되는 미팅에 참여해 미팅 내용을 기록하고 컴퓨터로 문서화해서 보고해야합니다. 미팅이 대부분 중국어로만 진행되기 때문에 하는 업무 중 가장 긴장되고 어렵지만, 다양한 종류의 회사를 알아갈 수 있고, 인턴실습생에 흔치않은 기회라 얻어갈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는 번역입니다. 저번 달에 있었던 투자유치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명찰이나 숙지사항, 안내사항, 초청서까지 전부 한글로 번역하거나 중문화하는 작업을 맡아했습니다. 또 투자유치회 당일에는 중국인과 함께 사회를 맡아 진행했습니다.

이외에도 커피타기부터 사무실 비품정리 등 소소한 일들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회사의 출납 업무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회사 분위기는, 각자의 업무가 정확하게 분담이 되다 보니 수평적이고, 자율적입니다. 출퇴근이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또 일주일에 한번 점심시간에 다 같이 회식을 하는 것 말고는 따로 회식이 없습니다. 회식이 없다는 것이 저는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소속감이 덜 들고, 결속력이 약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회사의 규모가 생각보다 작고, 하고 있는 일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 실망하고 의기소침해진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많은 일을 맡고 조금씩 해내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매일 성장해나가는 자신을 보니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보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떤 태도로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2년 전 이곳에서 교환학생을 하면서 막연하게 꿈꿔왔던 해외취업을 이렇게 미리 직접 경험할 수 있게 지원해주는, 코어 사업단의 해외인턴 프로그램에 대해 감사함을 느낍니다. 약 5개월 동안의 시간이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여기에서의 인턴 생활은 앞으로 저의 삶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인턴생활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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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허창에서의 인턴십(중문과 한의석)

<그림 1 인턴기간 중 근무했던 사무실 자리>

무역부서에서 근무할 때 많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메일을 잘못 발송할 뻔 하기도 하고 갑자기 컴퓨터 서버가 다운되어 반나절 작성한 문서가 날아가기도 했지만, 이쪽 직종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생각을 키워주기도 했던 잊을 수 없는 저의 자리입니다.

 

<그림2 근무회사 전경 (입구)>

첫 출근 날 입구를 들어가는 데 무척 긴장이 되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을 잘 따라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하기도 했었습니다. 초반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라 힘들기도 했었지만 배워가며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엔 두 달 여간 직원분들의 도움아래 잘 적응하여 나중에는 본래 다녔던 직장처럼 잘 다녔습니다.

 

<그림 3 자재관리 및 운반 업무를 한 물류부서에서>

40도에 가까웠던 무더운 여름 날 에어컨 없이 일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지만, 직원 분들이 모두 착하셔서 쉬는 시간마다 음료수나 간식거리를 챙겨주셨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힘든 일 중 소소한 재미였습니다. 근무경험과 더불어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림 4 근무회사 전경 (내부)>

직원들 모두 다른 경로를 통해 그곳에서 일을 하고 계셨고,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저에게 많은 조언들을 해주셨습니다. 그 조언들은 제게 하나하나 다 의미 있는 말들이라 아직도 기억이 선명합니다. 또한 진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림 5 시내 전경>

제가 근무한 허창 바로 옆에 중국의 교통중심지로 유명한 정주가 위치하고 있어 주말을 이용해 근교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해외에서 근무하는 경험과 동시에 해외여행도 다닐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해외인턴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생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러한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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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와 매너의 나라, 일본 오키나와에서의 인턴십 (일문과 황지혜)

중학교 3학년 때, 왠지 외국어를 배우고 싶었다. 외국인과 대화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게 즐거웠고, 같은 의미의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게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여러 가지 언어들 중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게 일본어였다. 다른 언어에 비해 한국어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 배우기 쉽고,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대부분의 어학 공부가 그렇겠지만 초반에 열심히 해 나가다 본격적인 단계에 돌입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포기하고 싶어지는데 나 또한 그랬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노력은 대학에 들어온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만 배우다보니 어떤 한계를 느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직접 경험하고 싶어, 새로운 도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번 2017년도 1학기 오키나와 인턴십이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17일, 약 25주간(2017.3.1.~2017.8.17.)의 인턴십을 끝냈다. 내가 일한 곳은 오키나와의 중심지 나하시(那覇市)에 있는 가리유시 어번 리조트호텔(かりゆしアーバンリゾートホテル)이다. 수많은 고객들을 상대하기 위해 항시 대기하는 벨(bellboy)과 프런트(front desk), 맛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레스토랑(restaurant), 청결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힘쓰는 드림하우징(ドリームハウジン), 그들을 위해 일하는 총무부 등 여러 부서들까지 이 중 내가 속해있던 곳은 레스토랑이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직원과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한 고객들이 있는 덕에 호텔은 항상 사람들이 뿜어내는 생기로 가득한 공간이다.

레스토랑에서의 인턴은 직원과 다를 바 없다. 디너(dinner) 시간대를 맞아 2시 출근과 10시 30분 퇴근을 하며, 디너의 시작부터 마감까지를 준비한다. 조식과 런치에 있어 차별화를 두고, 디너만의 고급스러움과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해 조명 색깔이 달라지고, 테이블에 일일이 크로스(cloth)를 깐다. 직접 만든 왕관과 캔들(candle)까지 놓아주면 디너만의 분위기는 더욱 풍요로워진다. 언제나 고객들을 우선으로 그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간에 회의를 열어, 어제를 반성하고 오늘을 시작하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디너가 시작되면 모든 직원들은 고객에 의해 움직이고 행동하게 된다. 비싼 코스요리와 세트메뉴 등 고객들이 요구하기 전, 그들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선을 지키며 주위를 돌면서 접시 상태를 살펴보고, 다음 요리를 준비한다. 일의 효율성을 내기 위해 모든 직원이 무전기를 통해 대화를 하며, 이런 것들을 통해 서비스 자세와 일본어 실력이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듯이 나의 인턴 첫날은 어제 있었던 일 마냥 아직도 생생하다. 그들 속에 동화되기 위해 몸에 익숙지 않은 유니폼과 정장용 구두를 신고 입에 경련이 나도록 미소를 지으며 미숙한 일본어로 고객들을 상대하는 '평소의 나'가 아닌 '사회에 나오게 된 나'를 마주하게 된다. 나름대로 자신 있던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소통하지 못해 좌절감을 맛보게 되고, 모든 것을 처음으로 꾸민 몸이 불편함을 토로하며,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일에 실망감을 안게 되고, 생각보다 고된 일에 한숨만 내쉬게 된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수백 번이 넘지만, 나에게 있어 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끝냈다는 만족감은 모든 불만을 잊게 만든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보다 오늘 배운 것들을 활용해보고자 하는 노력과 끈기는 첫날의 절망감을 이겨냈다. 매일을 이렇게 노력과 끈기를 통해 성장해 나갔다.

모든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레스토랑 내에서의 일 또한 언제나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조심한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유리잔과 접시를 깨왔고, 순간의 실수로 고객들에게 민폐를 끼칠 때도 있었으며,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곤란했던 일도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실수에 대해 직원들은 꾸짖지 않고 말없이 같이 접시를 치워주었고, 잘못에 낙담해 있던 나에게 오히려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었다. 그들은 잘못과 실수에 대해 나무라지 않고, 스스로 반성할 시간을 주며 그들만의 방법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이들과 대화를 하며 나 또한 마음의 여유와 기회를 배웠으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미성숙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타지에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도 소중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혼자만이 느끼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과거를 회상해 돌아보면, 모든 일이 재밌었고,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게 된다. 이번 인턴 또한 그러하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때까지 배웠던 일본어를 활용해 고객들을 상대했던 기억, 밤늦게까지 한국인 룸메이트와 함께 놀았던 기억,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자전거로 출퇴근했던 기억, 내 이름을 기억해준 손님이 있어 뿌듯했던 기억 등 모든 행복했던 기억들을 모아서 하나의 소중한 보물로서 간직하게 되었다. 인턴 기간 중 분명 힘든 일과 괴로웠던 일도 있었지만 그것들 또한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한걸음 더 성장해 나가는 밑거름으로서 나에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나는 비록 한국에 돌아왔지만, 인턴을 통해 얻은 모든 것들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앞으로도 살아가는 앞날에 힘들고 고된 일이 있겠지만, 인턴을 통해 얻은 스킬과 인내력, 배려로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가보고자 한다. 내 인생에 있어 이런 기회가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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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역의 파워블로거, 나야 나!

한국경영원, 중어중문학과 박성실

실습기관 소개
한국경영원은 정부지원 직업훈련 기관입니다. 직업훈련이란 구직자들의 취업역량을 높이고 취업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함, 또 현직자들의 직무역량을 높이기 위해 시행되는 교육과정의 교육비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사업입니다. 그리고 한국경영원은 그러한 교육을 온·오프라인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과정개발팀, 과정홍보팀, 교육생관리팀 등 직업훈련교육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여러 팀들이 유기적으로 협동하여 교육생들에게 최고의 교육기회를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형의 교육상품을 파는 기업의 특성상 교육상품에 대한 높은 이해와, 고객을 응대할 때의 서비스마인드가 필요로 하는 기관입니다.

현장실습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및 계획
정규학기를 다 마치고 공공연한 취업준비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학생이란 신분 하에 보호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음을 제 스스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업에서 실무를 운행하며 저를 성장시키고자 현장실습을 신청하였습니다. 또한, 요즘 신입사원들의 퇴사 이유 1순위인 ‘기업에의 부적응’에 대한 걱정을 없애고 싶었습니다. 처음 맡게 될 업무에 대해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 직장 내 상사와 동료들과의 관계에 적응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제 업무에 대해 그 능력치를 최대한 발휘하여 기업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리를 차지하고 그저 시간을 보내는 근로자가 아닌, 가치 있는 근로자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싶었습니다.

기업에서의 업무내용 및 현장 적응 노력
제가 맡게 된 업무는 한국경영원에 개설된 온라인 강좌를 블로그와 페이스북 등 SNS 홍보였습니다. 교육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 상품에 대한 홍보가 곧 마케팅이였습니다. 마케팅 중에는 가장 보편적인 SNS마케팅이지만, 본사에서는 지금껏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 전략을 수정하여 실행하는 걸음마 단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게 주어진 제대로 된 업무가 설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앉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간구하였습니다. 부서에서 SNS마케팅을 담당하시는 분과 끊임없이 회의하고 상의하여 전략을 뼈대를 잡고, 한번 시행해보자는 결론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한국경영원 오쌤원격평생교육원’블로그는 컨셉을 잡을 수 있었고 꾸준히 게시물을 업로드하는 것이 제 업무가 되었습니다.

현장실습을 통해 배운점 및 보람
롯데백화점 대학생 마케터, 지역 내 뮤직페스티벌 서포터즈, 마케팅콘서트 서포터즈 등 홍보와 관련한 다양한 대외활동 경험이 있습니다. 돌아보니 이는,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잠재적 고객을 직접 마주하는 오프라인 마케팅 활동이 주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실습기간 동안 내가 책임지는 계정을 받아 블로그를 꾸미고 채워나가는 SNS마케팅 활동은 제게 마케팅 관련 직무 커리어를 한층 넓혀주었습니다. 제가 작성한 글은 곧 기업의 소리이기에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마케팅의 직무 특성인 ‘매력적일 것’을 잃지 않는 홍보물을 작성하였습니다. 또한 온라인내 정보를 접하는 연령대에는 제한이 없기에, 어느 연령대가 접해도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홍보게시물 작성요령을 터득하였습니다.

진로탐색/취업과의 연계 경험담 및 취업성공을 위한 각오
한국경영원에서 블로그마케팅을 계획하고 이제 막 착수하려고 할 때에 현장실습생으로 들어가 해당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첫째 날엔 지시받은 업무가 없어 업무파악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둘째 날 오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습기간동안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며 나아가고자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산하교육기관만이 가지는 특성과, 본사에서 제공하는 교육의 의무성에 대해 강조하며 교육상품과 연계시켜 홍보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 후, 10회 이하였던 게시물 열람수가 일 100회를 훌쩍 뛰어넘는 성과를 보였습니다. 담당자님은 고민과 열심에 대한 대가라며 칭찬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본인의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할 때에 나타나는 성과에 대해 알게 되었고 앞으로 취업을 했을 때에도 이러한 자세로 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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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진로를 비춰준 현장실습

아시아문화원, 국어국문학과 염휘빈

실습기관 소개
아시아문화원은 아시아문화의 창의성과 다양성 개발을 통한 문화 관련 홍보·교육·연구 및 아시아 문화 관련 콘텐츠의 제작·유통 활성화를 위해 문화체육관광부가 2015년 10월 설립한 준정부기관입니다.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 원형자원의 기획 및 연구·개발을 통해 직접 전시·공연·페스티벌 등의 형태로 창작·제작하고, 결과물인 문화콘텐츠를 국내 및 아시아 시장에 마케팅 및 유통하는 시스템을 갖춘 21세기형 국제문화예술 교류·협력기관을 지향합니다.

현장실습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및 계획
전공수업시간에 고전콘텐츠에 대하여 수업을 듣고 나서 ‘고전과 인문학도 콘텐츠화를 하면 매우 좋겠다.’라는 관심이 생겼습니다. 고전 민담에서 소스를 차용해 크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도깨비’도 고전콘텐츠의 성공적인 사례였습니다. 문화콘텐츠에 관심을 갖던 도중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학 현장실습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화콘텐츠에 대하여 더 알고 싶었던 저는 조직 내에서의 업무의 처리과정과 실무적인 사무능력, 사업의 계획과 관리 등에 대하여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아시아문화원 문화사업팀에 지원하였습니다.

기업에서의 업무내용 및 현장 적응 노력
1주차에는 문화사업팀의 전반적인 업무에 대해 설명을 듣고 역대 월드뮤직페스티벌의 사진과 라인업을 보았고 2017ACC월드뮤직페스티벌의 전체적인 개요와 행사진행 자원 활동가들 모집을 주 과업 목표로 두었습니다. 자원 활동가모집을 위한 방안으로 SNS활용, 자원봉사홈페이지나 카페, 각 대학별 커뮤니티 등에 자원봉사자 모집공고를 올리며 신청자들의 현황을 유지하였습니다. 또 각 대학별 학생과에 자원봉사자모집에 대한 협조를 위해 공문을 발송하였고 전남대학교 단대별 게시판에 자원 활동가 모집포스터를 게시하였습니다.

2주차에는 적극적인 자원 활동가 모집활동을 위한 방안으로 부스운용계획을 작성하였고 담당선생님에게 많은 조언을 받고 부스운용기간 및 장소를 정하고, 배너와 현수막 제작을 진행하였습니다. 유인책으로 어느 판촉물을 사용할 것 인지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고 작성한 보고서를 팀장님께 보고 드리며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조선대학교 중앙도서관과 협조하여 중앙도서관 내에서 부스를 운용하였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신청서작성 및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포스터를 나눠 주었고 페스티벌 자원봉사자에 대하여 설명해주기도 하였습니다.(사진1,2) 또 전남대학교 일대에 학생의 유동량이 많은 곳에 포스터를 게시하여 현장에서 직접 정보를 접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사진3,4)

3주차에는 아시아문화원에서 주최하는 2017ACC월드뮤직페스티벌의 자원활동가 ‘광월반디’모집 지원서가 접수 되는대로 현황을 유지하였고, ‘광월반디’내에서도 세부분류로써 홍보지원, 운영지원, 무대객석지원, 국제교류 로 나뉘며 각 파트별로 자원활동가 배치 및 국제교류 파트 전화인터뷰 진행, ACC웹사이트에 공고할 합격자현황 문서작업, 합격자 공고 후 문자알림 협조요청, 합격자 활동일정과 기타 문의사항 전화응대 등 의 업무를 하였습니다.

4주차에는 2017ACC월드뮤직페스티벌 자원활동가 ‘광월반디’의 전체교육 오리엔테이션 교육계획 수립하였으며 교육 자료집 작성 보조, 현수막 배너 제작 요청 등을 하였습니다. 2017ACC월드뮤직페스티벌 ‘반디밴드’모집홍보 및 지원서 접수현황 유지하였습니다. 자원활동가 ‘광월반디’의 오리엔테이션 현장 보조, 오리엔테이션 이후‘광월반디’ 간담회 참여하여‘광월반디’사전홍보 일정 공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참석여부 확인 설문지를 작성하여 응답별로 현황 정리를 하였습니다.

‘광월반디’ 오리엔테이션 미참석자 개별연락 및 선발자 현황 유지, 2017ACC월드 뮤직페스티벌 해외아티스트 공연 및 체류일정 확인, ‘광월반디’ 전체공지 및 문의를 위한 연락방을 개설하여 자원활동가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축제홍보와 주변상권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주변상가와의 홍보 연계를 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속발전 가능한 성공적인 지역축제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주최기관 직원뿐만 아니라 주변상가와 주민들 또한 그 역할이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함께하는 축제라는 점에서 정말 뜻 깊은 축제가 될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현장실습을 통해 배운점 및 보람
하나의 큰 사업이더라도 그 내부에는 각각의 연결된 사업부문이 있고 그중 하나의 사업인 자원 활동가 모집을 1,2주차에 걸쳐 실습하였습니다. 어느 하나의 전반에 통용되는 이론은 없고 각각의 세세한 부분을 고려하여 각 사업별로 맞는 계획을 진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축제홍보와 자원 활동가 모집홍보는 언뜻 보기에 같은 사업으로 보이지만 타겟, 홍보내용, 축제에 대한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전략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홍보활동에 필요한 장소협조와 공문발송 운용에 필요한 자원을 고려할 수 있었고 현황유지를 하기위해 엑셀과 한글을 이용하였습니다. 실무적인 사무능력이 조금은 향상 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발송할 공문의 내용이나 형식, 보고서의 양식과 내용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SNS 및 온라인상의 홍보활동을 하였지만 생각보다 지원자들의 수가 낮았습니다. 지역축제의 성공여부는 그 지역주민들의 자원봉사참가에 따라 달린다고 생각했기에 광범위한 온라인홍보는 효과가 미미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문화원 인근 대학생들을 타겟으로 하여 홍보활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2주차에서의 조선대학교 및 전남대학교에서의 부스운용 및 포스터부착은 눈에 띄는 성과를 보였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는 시점에서 자원 활동가들의 신청서를 계획인원까지 모두 모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온라인홍보활동이 효과적이라 생각하였지만 온라인홍보활동은 축제홍보에는 적합하나 자원봉사자 모집에는 그렇게 많은 성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인근 대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면 현장에서 질문 사항 등을 그때그때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아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광월반디’ 지원 현황, ‘반디밴드’ 지원 현황, 지원서를 통해 합격자 선발 및 공고용 문서 등 문서작업을 하며 실무적인 사무컴퓨터 활용능력이 조금은 는 것 같아 기뻤습니다. 이전에 작성된 문서를 보며 양식에 대하여 많은 참고가 되었고 이후에 문서를 작성할 때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광월반디’ 합격자 대상으로 하는 전체교육 오리엔테이션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장소하나 책상 등의 물품하나에도 협조요청이 반드시 필요하였고 이후 감사대비 사진촬영도 필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참석 등록부 부스 운용시에도 참석자들의 동선과 작성서류 수량에 따라 배치가 효율적 이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작은 것에도 상대를 위한 배려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광월반디’ 자원활동가들과의 간담회에서 사전에 편성한 조를 통해 인사와 공지를 하였지만 시간배분을 신경 쓰지 못하여 몇몇 조에는 짧은 시간의 대화를 하여 아쉬웠지만, 이전 광월반디 경험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추후 회식이나 다과회 등의 형태의 간담회 주최를 건의 받아 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간담회 주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모집인원에 비해 중간이탈자들도 꽤 많았기에 계획된 인원선발은 중간이탈자를 고려하여 선정해야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콘텐츠를 기획, 유지 하려면 먼저 그 안에 있는 작은 사업 하나하나에도 많은 준비와 수고가 든다는 것을 현장에서 깨달을 수 있어서 좋았고 머릿속에만 담고 있던 막연한 생각들을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되새겼습니다. 아직 취업에 대하여 막연하거나 불안함을 느끼는 학우들에게 현장실습을 꼭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진로탐색/취업과의 연계 경험담 및 취업성공을 위한 각오
8주라는 짧은 현장실습기간이지만 콘텐츠 및 공간 활성화사업을 기획 및 관리하는 문화사업팀 내에서 조금이나마 직접 계획안을 짜보기도 하고 그 계획안의 내용을 현장수행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음 계획안을 짜고 간접적으로는 담당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협력업체와의 회의나 토의 등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일의 흐름 같은 값진 실무경험들을 얻었으며 실무적인 사무업무에 필요한 한글워드와 데이터관리를 위한 엑셀 활용법 등을 숙지하게 되어 좋았습니다. 막연하게만 ‘콘텐츠에 대해 알고 싶다 ’ 는 마음에서 콘텐츠기획자가 되어 직접 콘텐츠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싶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귀중한 현장실습의 경험을 살려서 콘텐츠기획자라는 진로를 꼭 달성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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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오키나와 (사학과16 배가현)

해외현장학습 소감문(사학과16 배가현)

 

지난 8월 16일부터 19일까지 오키나와로 해외현장학습을 다녀왔다. 현장학습을 가기 전에 자료집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자료집 준비 도중에 큰 갈등이 생겨 하마터면 완성하지 못할 뻔 했다. 하지만 이내 해결되었고 오키나와로 출발하였다.

첫째 날 도착 후 자유 시간에 동기들과 함께 나하의 번화가인 국제거리에 갔다. 국제거리에서 물건들을 사는데 그 동안 조금씩 배웠던 일본어가 이럴 때 유용하게 써져서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키나와는 우리나라보다는 길거리가 비교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키나와 현지인들도 친절하게 대해줘서 첫째 날을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었다.

둘째 날에는 슈리성, 긴죠우쵸 돌다다미길, 히메유리의 탑 그리고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했다. 둘째 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오키나와 현지인분과 간담회를 한 것이었다. 간담회 동안 오키나와가 평화를 위협받는 상황이라는 것과 오키나와 주민들과 극우 세력과의 갈등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키나와의 상황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비슷한 것 같아 조금은 공감이 되었다.

셋째 날에는 츄라우미 수족관, 만좌모, 치비치리가마, 카데나 미군기지, 나가구스쿠 성터를 방문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유명 관광지 오키나와.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학살의 흔적과 미군기지. 이번 해외현장학습에서는 오키나와의 두 가지 모습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고, 오키나와를 마냥 관광지로만 알고 있었던 나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국제거리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지고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귀국하면서 ‘오키나와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되어 일본사를 공부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다’는 만족감과 ‘내가 아직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어서 일본 현지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볼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사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해외현장학습을 한번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번 오키나와 해외현장학습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사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일본으로 해외현장학습을 가면 주로 교토나 도쿄 등을 간다고 들어서 오키나와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굉장히 의아했었다. 나에게 오키나와는 단순히 관광지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료집을 준비하며 오키나와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오키나와는 생각보다 오래되고 아픈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이 자리 잡던 곳이었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지상전이 펼쳐졌던 곳이자 아직까지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불리는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오키나와 해외현장학습은 특이하지만 의미 깊었다.

또한 이번에 해외현장학습은 일본 전문 역사문화해설사 선생님과 동행해서 일본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국내현장학습의 경우 교수님들과 학우들만이 같이 가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어서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 역사문화해설사 선생님께서 오키나와에 대한 뒷이야기와 일본 문화에 대해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딱딱하다는 내가 가진 현장학습 이미지를 탈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키나와 현장학습은 관광지와 유적지 관람 일정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더욱 흥미로웠다. 그 동안 사학과의 현장학습은 유적지 관람이 대부분을 차지해서 많이 배울 수는 있지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번에는 관광지에도 방문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 현장학습이 역사문화해설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육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유적지뿐만 아니라 문화‧관광지에 대한 해설 방식도 함께 체득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 해외현장학습은 사학과에 입학한 이래로 가장 인상이 깊었고 기억에 남은 최고의 현장학습이었다. 이번 답사에 참여했던 임종명 교수님, 김성은 교수님, 조교 선생님, 대학원생 오빠들 그리고 수아 친구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그리고 자료집을 만드느라 무척 고생이 많았던 우상 오빠, 승혁 오빠, 정현 언니, 영호 오빠, 은서, 후경, 소라, 혜원, 혜인이에게 그 동안 고생했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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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오키나와 (사학과13 심우상)

해외현장학습 소감문(사학과13 심우상) 

일본에서 가볼만한 지역은 많지만, 오키나와만큼 매력적인 곳은 찾기가 어렵다. 오키나와는 섬이라는 환경으로 인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름다운 바닷가와 함께 여러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올해의 해외현장학습 지역이 일본 오키나와라고 들었을 때, 오키나와를 휴양지로 알고 있었던 나는 이런 휴양지를 가고 싶어서 해외현장학습을 신청했다. 그래서 준비 스터디를 갔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갔었다.

하지만, 스터디를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오키나와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많이 변했다. 우선 오키나와는 과거의 역사가 많은 고통을 가지고 있었고 제주도와 각별한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터디 중에서 현장학습의 의미를 좀 더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장학습을 갈 때, 우리는 그곳을 외부인의 시각으로만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외부인의 시각은 그 지역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 정보 습득에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교수님께서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인 시도였고 현지인들의 시각으로 보는 오키나와를 알게 되었다.

스터디를 마치고 한국에서 출국해서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오키나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일본은 이전에도 와본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오키나와는 본토보다 좀 더 관광객에게 익숙하고 살짝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키나와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었다.

현장학습을 간 곳을 전부 적을 수는 없지만, 치비치리가마, 히메유리 탑 그리고 평화기념공원이 제일 인상이 깊었다. 이 세 곳은 전부 오키나와 전투와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치비치리가마는 당시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장소였다. 히메유리 탑은 국가의 폭력에 희생당했지만, 이런 희생을 등에 업고 당시 기득권층에게 면죄부를 주는 장소였고 평화기념공원은 오키나와인들 스스로 기존의 일본에 있었던 폭력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기위해 노력하려는 것이 보이는 장소였다.

오키나와는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독특한 곳이었다. 류큐 왕국이후 일본에 강제로 통합되어 태평양 전쟁 때는 일본의 방패막이 되어서 전쟁의 피해를 겪은 곳이었다. 거기에 일본 국가의 폭력에 피해를 당한 곳이기도 했다. 이번 해외현장학습을 오지 못했다면 나는 오키나와를 그저 관광과 휴양을 위한 섬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런 폭력은 이제 동물들을 향하고 있었다. 돌고래쇼를 보고 있었을 때, 이 돌고래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돌고래를 가두고 힘들게 했을 것을 생각하니 아직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장학습이라는 학습을 위한 목적으로 갔지만, 평소 여행을 갈 때도 가벼운 마음으로 가는 것 보다는 그곳이 겪었던 역사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해외현장학습을 마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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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秦昰旅行記(사학과14 박진하)

秦昰旅行記(사학과14 박진하)

진이라는 나라는 오랜 기간 나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우리나라의 고대국가도 아닌 중국의 고대 국가가 나에게 감동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처음 진을 알았던 그 때부터 진의 이야기라면 눈이 가고 시황제의 이야기라면 귀가 갔다. 그래서 이번 하계 해외현장학습의 목적지가 진시황제의 ‘서안’임을 알았을 때 나는 안 갈수가 없는 마음이 되었다. 현장학습이 끝나면 진에 대한 감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현장학습을 기다렸다. 현장학습이 가까워질수록 직접 진시황을 마주치는 것 같은 기대감도 천천히 커져갔다.

이번 하계 현장학습에서 다룬 진의 유적은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그리고 진시황의 지하궁전이다. 출발하기 전 먼저 둘러볼 유적과 박물관 등을 설명하는 책자를 현장학습에 참여하는 인원이 제작하였다. 내가 현장학습에 참여한 목적이 진시황릉에 가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책자에 실린 내 글 역시 진시황릉과 지하궁전에 대한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 나는 내가 오랜 기간 관심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이미 아는 것을 바탕으로 즐겁게 글을 쓸 것이라 생각했고 자료 또한 많아서 수월하게 글을 완성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즐겁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이었으며, 진시황릉에 대한 연구는 병마용갱을 제외하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서 자료도 많지 않았다. 심지어 능의 크기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능의 크기를 추측하는 글을 보았을 땐 과연 글을 완성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완성된 글의 내용은 지금까지의 연구보다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지하궁전의 모습과 진시황제에 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쓰면서 자꾸 억울한 마음과 함께 중국이 진시황릉의 연구를 아직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글을 완성하고 나서도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아 이에 대해 알아보는 중 느린 진시황릉의 연구의 진행이 서안의 기술력 부족 때문이라고 하는 글을 보았다. 아마 진시황릉은 중국의 소중한 보물단지와 같아서 쉬이 뚜껑을 열어보지 못 하나 보다. 그리고 지금 파헤쳐서 제대로 연구를 못 하는 것보다 미래의 더 발전된 기술로 발굴을 하는 것이 진시황릉을 연구하는 것에 있어서는 더 좋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는 진시황릉에 관한 발굴이 많이 진행되어서 나중엔 진시황릉을 직접 들어가보고 싶다.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지하궁전의 방문은 중국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한국보다 훨씬 더운 날씨에 잠도 부족했지만 어서 빨리 병마용을, 그리고 진시황을 만나고 싶었다. 오전의 일정을 끝내고 드디어 나는 「사기」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는 지하궁전에 발을 딛었다.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의 지하궁전에는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과 화살, 강과 산, 별과 달 그리고 꺼지지 않는 초가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지하를 깊게 파내는 것도 어려운데 그 안에 강과 산을 만들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을 말 그대로 궁전처럼 만든 것은 죽음 후의 세계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어서도 ‘황제’로 남기 위해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는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서 머물 곳을 화려하게 짓는다면 죽어서도 황제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자본과 많은 노동을 투입하여 몇천년이 넘은 지금도 경탄이 나오는 무덤을 만든 것이 아닐까.

진시황의 내세관을 생각해보며 나는 지하에 축조된 지하궁전으로 들어갔다. 지하궁전으로 이어진 복도의 그림들은 나를 정말로 진시황의 지하궁전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지하궁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지하의 탁 트인 공간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높은 산과 하늘에 박혀있는 별이었다. 그리고 바다와 강으로 보이는 모형 한 가운데에 산의 높이에 다다르게 놓여진 관은 이 지하궁전의 주인공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실 기대에 못 미치는 완성도를 보이는 지하궁전이었지만 그래도 「사기」의 내용은 거의 표현된 것 같았다.

지하궁전을 뒤로하고 진시황릉 중 그나마 발굴이 많이 이루어진 병마용갱으로 향했다. 사실 가장 가장 많이 기대했던 곳이 바로 병마용갱이었다. 진시황릉의 유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병마용이기도 하며 심지어 서안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것 역시 병마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착한 순간부터 계속 병마용을 생각했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언제 병마용을 갈지, 이동을 하면서도 병마용의 순서는 아직 멀었는지 계속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서인지 마침내 병마용갱으로 가는 때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병마용은 무덤부장품의 일종으로 흙으로 빚은 인형이다. 원래 고대에 있던 장례풍습인 ‘순장’은 죽은 자를 위하여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시종들을 무덤에 함께 묻는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의 무덤은 사람을 직접 묻지 않고 대신 흙인형을 묻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다 고대엔 노동력이 귀중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묻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진시황의 사후를 위한 병마인 병마용은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개수가 매장되어 있다. 갱의 개수도 여러개이며 그 갱마다 배치된 병마용의 기능 역시 다양하다. 병마용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왔다. 특히 나는 병마용의 얼굴 생김새가 일치하는 것이 없으며 크기조차 일반인에 비해 크다는 사실 때문에 병마용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었다. 어떤 방식으로 병마용을 만들었을지 상상하며 병마용갱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1호갱에 들어갔다. 바깥에서 본 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굉장히 넓었다. 그리고 수많은 병마용들이 보였다. 정말 그 광경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직접 보니 더 거대했던 병마용들이 모두 한 방향을 보고 대열을 갖추어 서있는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웅장하며 엄숙해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한동안 말을 잃고 넋놓아 바라보기만 하였다. 함께 동행하였던 이성원 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병마용들은 머리와 몸, 팔과 다리를 따로 구운 후 마지막에 몸통에 나머지를 끼워넣어 완성한다고 한다. 또, 몇몇 병마용들을 보면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처음엔 색색의 병마용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교수님의 설명을 따라 병마용들의 이모저모를 보던 중 다른 병마용과 달리 팔의 비율이 조금 이상한 병마용을 발견하였다. 교수님은 과거 진시황의 병마용들을 만들 때 장인들이 주로 병마용을 만들었겠지만 장인들만 만들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아 일반인의 손을 빌렸을 것이라고 하며 그 병마용에 대해 설명하셨다. 병마용이 전시된 양쪽 길로 이동하며 아직 복원되지 않은 병마용들도 보고 각자 맡은 것이 달라 옷의 생김새도 다른 점도 확인하며 1호갱을 나왔다.

3호갱에는 지금까지 보았던 병사들이 아닌 지도자 계급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병마용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회의하는 듯 서로 마주보고 서있기도 했고, 중심이 되는 병마용을 호위하듯 서있기도 하였다. 이 곳은 1호갱처럼 공격적인 분위기가 아니라서 군대의 긴장감은 덜하였다. 하지만 무언가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가 갱 내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3호개은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관람을 마쳤다.

다음으로 간 2호갱은 특수한 임무를 가진 병마용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특히 2호갱에서 발굴된 궤사용은 보존 상태가 좋은 것 등의 이유로 장군용과 함께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궁수용을 기대하며 2호갱으로 갔다. 2호갱은 1호갱의 병마용과 다르게 생긴 병마용이 많았다. 잔뜩 부서진 병마용들이나 완성된 병마용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동물들처럼 보이는 용들도 많았다. 2호갱에서 특히 신기했던 건 나무가 돌로 변한 것이었다. 처음엔 그냥 벽인줄 알았던 것이 과거엔 나무였고, 또 그 안에는 병마용이나 다른 흙인형들이 있을 것이라는 게 정말 신기했다. 직접 내려가서 만져보며 나무의 결이 남아있는 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한게 아쉬웠다. 2호갱을 쭉 들어가면 완성도가 높고 흔치 않은 병마용들을 따로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다. 그 곳에는 장군용과 궤사용을 비롯하여 기마병, 독특한 자세의 병사용이 있었다. 이 전시장을 처음 갔을땐 그 정교함에 한 번 놀라고, 그 크기에 다시 놀랐다. 분명 1호갱에서 병마용의 전부를 확인한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감동이 더 물밀 듯 밀려왔다. 특히 장군용은 사진으로도 많이 보았고, 길거리에서 장식품으로도 많이 보았는데 실물을 직접 보니 잠시 말을 잃을 정도였다. 흙인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품에 나는 병마용을 제작한 장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다. 한동안 그 장군용을 감상하다 이어서 궁을 쏠 준비를 하는 자세의 궤사용, 말과 함께 있는 기마병 등을 보고 2호갱을 빠져나왔다.

2호갱의 지하에는 청동마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청동마차는 두 개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진시황이 실제로 타고 다니던 마차를 만든 것이다. 진시황은 상황에 따라 마차를 바꿔 탔으며 이 두 개의 마차 중 뒤쪽에 있는 마차에서 진시황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마차와 말들, 마부는 흙으로 만들어진 병마용처럼 크기가 크진 않았지만 섬세한 것은 같았다. 특히 나는 진시황이 죽었을 것이라는 청동마차가 유독 눈에 들어와 한참을 감상하였다. 어둠 속에 전시된 청동마차. 지하의 모든 빛은 청동마차를 향해 비춰졌다. 그 빛의 가운데에 있는 청동마차는 몇 천년이 지나 많이 녹슬어 있었다. 청동마차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닫혀져 있었는데, 녹슬었기에 조금만 건들면 열릴테지만 나는 그 문이 꽉 닫혀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꽉 닫혀진 문, 그 안에서 누군가가 밖을 내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그 곳에서 진시황이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고 들었기 때문일까,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2호갱까지 감상한 후 우리는 마지막으로 진시황릉의 중심이라고 추정되는 언덕으로 갔다. 진시황릉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그곳에 관이 있는 지는 알수가 없으며 언덕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산에 가깝다. 과거에는 이 진시황릉을 오를 수 있었지만 2010년부턴 금지되었다고 한다. 오르지 못 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무덤을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게 느껴졌다. 우리는 진시황릉에 도착해서 작은 자동차를 타고 진시황릉 주변을 크게 한바퀴 돌았다. 초록 나무로 우거진 진시황릉은 산과 흡사하게 생겨서 진시황릉이 맞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손에 잡힐 듯 가까워 금방이라도 그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전히 우리는 진시황릉에 대해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아 조금 아득하게 느껴졌다. 길지 않은 진시황릉의 감상을 마지막으로 진시황과의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진시황의 무덤, 진시황의 병사들은 세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축조물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특히 진시황릉은 아직도 발굴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그 감탄이 몇 배로 커질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뜻깊은 유적인 진시황릉의 주체는 흔히 진시황이라고 여겨진다. 나 역시 과거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시황릉을 보는 것은 진시황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시황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진시황릉을 직접 확인하고 마음 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진시황을 향한 감동이 아니었다. 진시황이 아닌 진시황릉을 축조한 진의 백성들에 대한 감동이었다. 현장학습이 진행될수록 나는 진시황보다는 진의 백성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비율이 잘 맞지 않은 병마용, 모두 다른 병마용들의 생김새, 상상조차 안 되는 지하궁전의 모습……. 그들의 노력이 진시황릉의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렇다, 진시황릉은 진시황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진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직접 진시황릉을 보고 나서야 그것을 피부로 마음으로 느꼈다. 비록 그들은 강제로 동원되었던 것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진시황릉은 그들의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매우 큰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이번 현장학습으로 느낀 감동, 그리고 경외감은 그들이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진시황릉을 간다면 그때는 처음부터 그들을 염두하며 진시황릉을 감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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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중국, 서안을 걷다(사학과15 김정현)

중국, 서안을 걷다(사학과15 김정현)

누구든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쳤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중국 황하(黃河). 황하가 운반하는 최상의 진흙은 범람을 거듭하며 황하 주변의 땅을 비옥하게 하였고 이 황하의 중류 유역에 서안(西安, Xian)이 위치한다. 위에서 내려다본 서안은 북으로는 고원, 남으로는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평원으로, 황하의 여러 지류가 모여 있어 수원(水源) 또한 풍부하다. 비옥한 토지, 풍부한 수원, 자연의 장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서의 서안은 중국 고대 역대 왕조의 수도로 역할을 했다. 서주(西周)때는 호경, 진(秦)때는 함양, 그리고 한(漢)·수(隋)·당(唐)에 이르러서는 장안으로 불리면서 서안은 대륙의 중심으로 자리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에게 가장 기대되는 순간은 글로 배웠던 역사의 현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에 관심이 깊은 나로서 이번 중국 서안 방문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중국과 한국은 고대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역사·문화·경제·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기에, 동아시아의 역사를 배우면서 중국을 경시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황하의 호구폭포를 통해 중국 문명의 탄생을 엿보았고, 진·한대의 도용(陶俑)을 비교하면서 왕조의 흥망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당대에 건립된 이슬람 사원과 명대의 성벽 위를 걸었으며, 의외의 공간에서 중국 근현대의 역사적 장면을 마주했다. 2016년 무더운 여름, 하계 해외현장학습을 통해 선사 황하 문명부터 근현대시대까지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중국 서안을 눈에 담았다.

 1. 중국 문명의요람 <황하 호구폭포 & 반파박물관>

호구폭포는 황하의 여러 지류(支流)가 한데 모이는 곳으로, 황하의 격동적인 움직임과 거대함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일행은 숙소가 있는 서안 시내에서 호구폭포까지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 도착했다. 서울에서 한반도 최남단인 해남까지 왕복 9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얼마나 광활한지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황하를 본다는 기대감과 ‘강물이 얼마나 누렇길래 이름까지 황하일까?’라는 의구심을 안고 호구폭포를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실제로 마주한 황하는 내가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황하의 물줄기는 누렇다 못해 거무튀튀했으며, 마치 초콜릿이 강을 이뤄 꾸덕꾸덕 흐르는 듯했다. 위 지평선으로부터 황하의 지류들이 한 대모여 엄청난 광음을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호구 폭포 밖에 작은 웅덩이에 진흙물이 고여 있어 들어 올려보니, 진흙이 손가락 사이로 흐를 정도로 흙의 입자가 곱고 부드러웠다.

최양질의 진흙이 흐르는 이 황하를 따라 다양한 선사 문명이 누층적으로 발전했다.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점은 앙소문화와 그의 토기이다. 다음으로 방문한 <반파박물관>은 선사 유적지 박물관으로, 앙소문화의 대표적 유적지인 반파촌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신석기 시대의 여러 유물 중에서도 역시 눈에 띄는 것은 당연 토기였다. 한국의 선사 문명의 토기는 표면이 거칠다면, 황하가 운반한 고밀도 진흙으로 빚어진 토기의 표면은 부드럽고 윤기가 났다. 그 위에 그려진 물고기 무늬는 아마 선사인(先史人)이 황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형상화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2. 중국 황제의 무덤 <병마용갱 & 한양릉박물관>

이번 하계 해외현장학습에서 가장 기대했던 일정이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이었는데, 한양릉 (漢陽陵)박물관과 함께 비교해 관람하면서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병마용 갱은 죽은 진시황제를 사후에서도 지키기 위해서 제작된 지하 궁전의 군대이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을 진시황제와 함께 묻을 수 없기에 흙으로 실제 사람의 크기로 빚었는데, 그 사실적인 표현과 거대한 규모로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병마용 갱을 둘러 싼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나는 병마용을 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병사의 지위에 따라 동작과 복장, 나아가 머리 스타일까지 제각각이었고, 얼굴의 골격과 모양에 따라 병사의 출신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었다. 가장 크고 많은 병마용을 갖추고 있는 1호 갱의 전면에 섰을 때, 거구의 병마용 군대가 마치 나를 향해 진군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그때의 기분을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흙으로 빚은 인형인 도용(陶俑)은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나는 진(秦) 다음으로 건국된 한나라의 도용들을 보기 위해 <한양릉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한양릉은 한나라 초기의 제 6대 황제인 경제(景帝)와 황후 동영의 합장릉이다. 이곳에서는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과는 또 다른 도용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시황제의 병마용은 군대의 모습을 실제 사람의 크기로 제작되어 근엄하고 엄격해 보인다면, 한양릉의 도용은 그의 1/3 크기로 인형과 같은 모습의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인다. 또한, 병마용에서는 병사와 전투용의 말에 한정되는 군사적인 모습만 확인할 수 있지만, 한양릉에서는 여성, 가축, 동물도용 그리고 생활 토기 등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제의 병마용과 한양릉의 도용의 모습에는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과 만리장성 건설 등의 대규모 사업은 곧 백성들의 몫이자 고통이었다. 백성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무거운 부역에 참여해야 했고 엄청난 세금이 동원되었다. 결국, 진시황제 사후 백성들의 불만이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으로 표출되었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멸망과정을 지켜본 한(漢)의 지배계층은 멸망의 요인을 답습하지 않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나라의 도용이 진나라의 병마용에 위세가 눌리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3. 세계제국 당나라를 만나다 <청진대사>

역사를 배우는 데 있어서 종교는 필수불가결한 부분인데, 이는 종교가 한 명의 사람을 뛰어넘어 집단의식과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의 사례를 보면 무슬림은 자신의 일평생 이슬람의 5대 의무를 수행하며 쿠란의 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이처럼 종교는 인간의 정신적 안식처인 동시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형성하고 제한한다.

때문일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종교를 둘러싸고 잦은 전쟁과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 당나라만큼은 달랐다. 당 왕조는 중국 전통 왕조들 중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왕조였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외국의 문화와 문물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지금의 서안)으로 집중되었다. 외국인과 함께 네스토리우스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이교도가 함께 전래하여 당 제국으로부터 다양성을 인정받았다.

나는 당 왕조 때 건립된 이슬람교의 사원인 청진대사(淸眞大寺)를 방문했다. 청진대사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건축된 이슬람 사원으로, 당 현종 천보1년(742)에 건설되어 지금으로부터 1,3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까지도 청진대사는 중국의 무슬림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슬람의 지식을 전수하는 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 청진대사에서는 둥근 돔과 모스크와 같은 현재 이슬람의 건축양식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불교 사원인가 할 정도로 의심할 수 있는데, 이는 이슬람의 건축양식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대의 무슬림들이 중국의 전통양식을 본떠 축조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청진대사에서는 이슬람의 문화와 당대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청진대사의 예배당의 지붕은 돔을 대신해 푸른빛이 감도는 기와가 얹혀 있고,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동아시아의 건축양식을 띄고 있었다. 반면 교회나 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조각상이나 인물화를 찾아볼 수 없었고, 예배당은 동서로 길쭉하게 뻗어있다. 이는 이슬람에서 신을 인간·동물로 그림이나 조각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금기이고, 알라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율법에 근거해 예배를 드릴 때도 자리에 위계를 따지지 않고 ‘ㅡ’자로 나란히 서는 이슬람인의 문화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당 왕조의 국제성은 예술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앞서 방문한 <섬서 역사 박물관>과 <한양릉박물관-특별전>에서 쉽게 당삼채를 만날 수 있었다. 당삼채는 당 제국(618~906)의 도기로, 주로 당시 귀족들의 장례용으로 제작되어 묘릉에 부장되었다. 남녀의 인물상에서부터 신상, 진묘수, 그리고 각종 명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당대 귀족의 생활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 중 서역인의 모습을 당삼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리부리한 눈과 큰 코, 이국적인 형상의 당삼채는 당나라과 장안이 세계제국이자 국제도시임을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4.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서안성벽>

서안을 돌아다니면 자주 서안성벽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서안 시내의 중심에 서안 성벽이 있기 때문이다. 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되었는데 본래 당나라 장안황성의 기초 위에 성벽을 올렸고, 그 이후에도 수차례의 공사를 걸쳐 방어체계를 구축했으며, 현존하는 중국의 성벽 중에 보존상태가 가장 뛰어나다.

서안성벽은 우리나라의 수원화성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서안성벽과 수원화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성벽을 구성하는 형식에 있다. 서안성벽은 성벽 기초부터 그 위의 전각까지 모두 흙으로 구운 작은 벽돌들을 촘촘히 쌓아 올린 데에 비해, 수원화성은 1m에 달하는 큰 화강암으로 성벽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작은 벽돌로 쌓아 올렸다. 서안은 질 좋은 진흙이, 한반도는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함으로 두 성벽 다 주변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적절하게 성벽을 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서안성벽은 직사각형의 형태로 서안 시내의 중심을 감싸고 있으며 전체둘레가 무려 13km에 이른다. 서안성벽을 따라 서안 시내의 모습을 천천히 보고 싶었지만, 땡볕 아래에서 그 길을 걷기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전거 대여가 가능하다고 하니 자전거로 서안성벽 위를 달려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서안성벽 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과거와 현대의 조화’였다.

명대에 지어진 성벽 위에서 높은 빌딩으로 가득 찬 서안 시내를 바라봤다. 서안성벽의 내부와 외부 모두의 공간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어서 안과 밖을 자유롭게 통행하는 버스와 사람들이 보였다. 옛 건물과 그 너머에 보이는 현대식 건물들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규모와 역사적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고, 현대와 과거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서안성벽은 곧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날이 멀지 않다고 느꼈다.

5. 중국의 중세와 근대가 공존하는 역사적 공간 <화청지>

화청궁(華淸宮)으로도 불리는 화청지는 본래 온천으로 유명한 곳으로, 여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주나라 때부터 이곳에 왕실의 별장이 만들어졌고, 이후 진·한·수나라를 걸쳐 당나라 현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화청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하다. 당 현종은 통치 말까지 양귀비와 화청지에서 머물었기 때문에, 당 현종과 양귀비가 이용했다는 욕탕이 남아 있다.

한편 화청지는 당 후기 안사의 난으로 현종이 궁을 버리고 피신하자 점차 황폐해져 갔지만, 근대에 들어서 다시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공산군 토벌을 위하여 섬서성 서안에 주둔 중인 장쉐량과 휘하의 만주군이 독전(督戰)을 위해 경내의 오간청(五間廳)에서 머물던 장제스를 구금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을 결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對) 일본 전쟁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제2차 국공합작’을 타결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긴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역사의 현장을 한 공간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너무 넓어서 입구에서부터 한참 헤맨 끝에 발견한 화청지 욕탕. 역시나 붐비는 관광객들의 물결에 휩쓸려 허둥지둥 관람할 수 밖에 없었다. 당현종의 연화탕(蓮華湯), 양귀비의 해당탕(海棠湯)과 더불어 관리들의 욕실인 상식탕(尙食湯), 태자탕(太子湯)등 여러 욕탕이 있다. 현재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보보경심;려>에서 나오는 다미원의 욕탕의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욕탕 뒤로 넘어가서 많은 전각들 사이에 있는 오간청(五間廳)을 찾았다. 오간청을 둘러싸고 있는 벽면에 제2차 국공합작의 과정과 관련 인물들의 설명이 부착되어 있고, 오간청의 벽면의 총탄 자국은 그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말해 주는 듯 했다.

하계 해외현장학습을 마치면서

앞서 소개했던 방문지 이외에도 섬서성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섬서 역사 박물관>, 한나라 무제의 대외업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릉 박물관>, 중국 불교 최대의 성지인 <법무사>, 비석으로 이루어진 <비림 박물관> 등등 서안의 이곳저곳을 방문했는데 함께 소개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비단 A의 역사가 A만의 것으로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여러 국가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는데, 대부분 비슷한 맥락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잘못을 거듭하지 않기 위한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마치 서안성벽에서 수원화성이 떠오르는 것처럼 의외의 곳에서 자국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나 중국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동아시아에 미치는 영향력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이번 하계 해외현장학습을 통해서, 한반도를 벗어나 동아시아 유교·불교·한자 문화권의 중심이 되었던 중국을 살펴보았다. 중국은 ‘대륙’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어디를 가든지 거대하고 웅장했다. 중국 음식을 직접 먹어보니 왜 중국인이 ‘차(茶)’를 사랑하는지도 깨달았고, 온종일 사람으로 가득 찬 거리를 걸어보니 중국인들이 왜 목청이 높은지도 짐작이 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중국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바를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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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드는 사람 - Hewlett Packard Enterprise 기업...

손을 드는 사람
- Hewlett Packard Enterprise 기업 방문 수기

 휴렛팩커드와의 첫 인연은 코어사업단의 커피톡 멘토링에서 시작되었다.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시는 분들의 멘토링이라고 하여 한국과는 어떤 점이 다를지 기대가 되었다. 멘토링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시작 전 온인선 팀장님께서 보여주신 동영상이었다. 어떤 내용을 시사하고 있는지 학생들에게 물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이 손을 들고 도움을 청했기에 변화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2시간 동안 학생들의 질문에 성심 성의껏 답해 주셨다.
 나도 모르게 지방대 학생이라는 생각으로 나의 가능성을 낮추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멘토링 내내 동기부여가 되었고 외국계 기업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느꼈다. 두 분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우리들의 이야기에 경청해 주셨고 진심으로 조언해 주셨다. 멘토링이 끝난 후 이런 생각들을 눌러 담아 감사의 연락을 드렸더니 팀장님께서 회사로 초대해 주셨다.

 평소 여의도를 지나다니며 높은 빌딩 안에는 누가 일을 하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감사하게도 회사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좋았던 점은 직접 느낄 수 있던 회사의 수평적이지만 체계적인 문화와 한국기업과의 구조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저녁 식사 때는 전중훤 전무님과 박대범 부장님께서 오셔 함께 면접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커피톡 멘토링과는 다르게 조금 더 편한 분위기 속에서 평소에 관심 있었던 직무와 사회공헌분야 같은 부분도 여쭤볼 수 있었다. 면접을 대비해서 답변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친구들과 논리적으로 이야기 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기소개서에는 과거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회사에서는 미래에 함께 일 할 직원을 뽑는 것이므로 미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면 더욱 좋다고 하셨다. 직무 부분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선배로서 얘기를 많이 해주셨기 때문에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고충에 대해 조언을 얻을 수 있어 더욱 뜻 깊은 시간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팀장님께서 보여주신 동영상처럼 우리는 손을 들어서 기회를 만들었고 이번 만남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도 계속 손을 들어 도움을 구하고 배울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갈 것이다. 흔쾌히 시험이 끝나고도 다시 방문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해 주셨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팀장님, 전무님, 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또한 소중한 인연을 만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신 코어사업단 교수님들께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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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에서 온 편지-LG Chem (철학과 서예원)

안녕하세요. 저는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에 재학중인 서예원 입니다. 
  
  저는 2016년 9월부터 2017년 2월, 6개월간 LG화학 독일 법인의 전기차 배터리 마케팅 부서에서 인턴십 활동을 하고있습니다. 4학년 2학기에 본 프로그램을 다녀 온 거라 취업 준비가 눈앞에 닥친 때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인턴 활동은 미리 사회를 경험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직원이 아닌 오히려 인턴이기에 한발짝 떨어져 회사 환경과 생활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모든 일에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회사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함께 마케팅 부서에서 일한 과장님, 부장님께서 누누이 하시는 말씀이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회사에서는 결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조언을 해주셨던 어떤 차장님께서는, 한 개인의 직무 능력이 뛰어난 것 보다 다른 사람과 소통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내며 회사에서도 선호한다고 하신 것이 가장 생각에 남았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회사지만 일단 한국 회사이기에 업무의 대부분이 영어(저는 독일어를 하지 못하고, 현지 채용인 들을 제외하고는 주재원분들도 영어로 소통을 합니다)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것 외에는 한국의 직무 환경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인들 간에는 상하관계가 분명했지만, 독일인과 한국인 혹은 독일인과 독일인 사이에서는 상하관계를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습니다. 마트나 음식점, 역 어디를 가든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그래도 독일어를 알았더라면 훨씬 생활이 편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한번, 인턴으로 한번 간 적이 있는데, 그 때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고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며 살아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생활하며 처음으로 해외거주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언어의 장벽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거의 제 인턴 생활이 막바지에 이르렀기에 새로운 인턴을 모집하고있으며, 채용 담당자인 과장님과 함께 이력서를 보고 지원자들과 전화면접하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력서에 오타가 있거나 회사명을 잘못 적으면 더 보지도 않고 바로 종이에 X자가 쳐집니다. 가령 저희 회사는 LG Chem인데, LG Chemical이라고 적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회사명을 틀리는 실수를 누가 하나 하지만 의외로 많다고 하셨습니다. 과장님께서 일단 서류에 통과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이력서는 그저 종이에 불과하다고 하시며 첫 마디인 “안녕하세요”부터 이 사람이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할 사람인지 아닌지 느껴진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전화면접 하는 것을 함께 들으니 어렴풋이 그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틀에 박힌 상투적인 대답이나 암기한 느낌이 드는 답변을 피하기 위에 예고없이 전화를 걸어 면접을 보는 거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고, 무엇을 유의해야할 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열정적이고 자신 있는 사람은 목소리 톤부터 달랐습니다. 역시나 그랬던 분들이 면접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취업을 준비할 때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잘 활용 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해외 인턴을 생각하고 지원하려는 분들께서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이 경험을 어떻게 활용하고 나 자신을 발전시키느냐는 자기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습니다. 

 

(* 서예원 학생이 독일 생활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다양하게 보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