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학생수기

코어사업단의 국내,해외 인턴 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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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오키나와 (사학과16 배가현)

해외현장학습 소감문(사학과16 배가현)

 

지난 8월 16일부터 19일까지 오키나와로 해외현장학습을 다녀왔다. 현장학습을 가기 전에 자료집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자료집 준비 도중에 큰 갈등이 생겨 하마터면 완성하지 못할 뻔 했다. 하지만 이내 해결되었고 오키나와로 출발하였다.

첫째 날 도착 후 자유 시간에 동기들과 함께 나하의 번화가인 국제거리에 갔다. 국제거리에서 물건들을 사는데 그 동안 조금씩 배웠던 일본어가 이럴 때 유용하게 써져서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키나와는 우리나라보다는 길거리가 비교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키나와 현지인들도 친절하게 대해줘서 첫째 날을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었다.

둘째 날에는 슈리성, 긴죠우쵸 돌다다미길, 히메유리의 탑 그리고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했다. 둘째 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오키나와 현지인분과 간담회를 한 것이었다. 간담회 동안 오키나와가 평화를 위협받는 상황이라는 것과 오키나와 주민들과 극우 세력과의 갈등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키나와의 상황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비슷한 것 같아 조금은 공감이 되었다.

셋째 날에는 츄라우미 수족관, 만좌모, 치비치리가마, 카데나 미군기지, 나가구스쿠 성터를 방문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유명 관광지 오키나와.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학살의 흔적과 미군기지. 이번 해외현장학습에서는 오키나와의 두 가지 모습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고, 오키나와를 마냥 관광지로만 알고 있었던 나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국제거리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지고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귀국하면서 ‘오키나와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되어 일본사를 공부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다’는 만족감과 ‘내가 아직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어서 일본 현지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볼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사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해외현장학습을 한번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번 오키나와 해외현장학습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사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일본으로 해외현장학습을 가면 주로 교토나 도쿄 등을 간다고 들어서 오키나와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굉장히 의아했었다. 나에게 오키나와는 단순히 관광지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료집을 준비하며 오키나와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오키나와는 생각보다 오래되고 아픈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이 자리 잡던 곳이었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지상전이 펼쳐졌던 곳이자 아직까지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불리는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오키나와 해외현장학습은 특이하지만 의미 깊었다.

또한 이번에 해외현장학습은 일본 전문 역사문화해설사 선생님과 동행해서 일본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국내현장학습의 경우 교수님들과 학우들만이 같이 가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어서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 역사문화해설사 선생님께서 오키나와에 대한 뒷이야기와 일본 문화에 대해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딱딱하다는 내가 가진 현장학습 이미지를 탈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키나와 현장학습은 관광지와 유적지 관람 일정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더욱 흥미로웠다. 그 동안 사학과의 현장학습은 유적지 관람이 대부분을 차지해서 많이 배울 수는 있지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번에는 관광지에도 방문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 현장학습이 역사문화해설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육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유적지뿐만 아니라 문화‧관광지에 대한 해설 방식도 함께 체득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 해외현장학습은 사학과에 입학한 이래로 가장 인상이 깊었고 기억에 남은 최고의 현장학습이었다. 이번 답사에 참여했던 임종명 교수님, 김성은 교수님, 조교 선생님, 대학원생 오빠들 그리고 수아 친구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그리고 자료집을 만드느라 무척 고생이 많았던 우상 오빠, 승혁 오빠, 정현 언니, 영호 오빠, 은서, 후경, 소라, 혜원, 혜인이에게 그 동안 고생했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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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오키나와 (사학과13 심우상)

해외현장학습 소감문(사학과13 심우상) 

일본에서 가볼만한 지역은 많지만, 오키나와만큼 매력적인 곳은 찾기가 어렵다. 오키나와는 섬이라는 환경으로 인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름다운 바닷가와 함께 여러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올해의 해외현장학습 지역이 일본 오키나와라고 들었을 때, 오키나와를 휴양지로 알고 있었던 나는 이런 휴양지를 가고 싶어서 해외현장학습을 신청했다. 그래서 준비 스터디를 갔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갔었다.

하지만, 스터디를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오키나와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많이 변했다. 우선 오키나와는 과거의 역사가 많은 고통을 가지고 있었고 제주도와 각별한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터디 중에서 현장학습의 의미를 좀 더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장학습을 갈 때, 우리는 그곳을 외부인의 시각으로만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외부인의 시각은 그 지역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 정보 습득에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교수님께서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인 시도였고 현지인들의 시각으로 보는 오키나와를 알게 되었다.

스터디를 마치고 한국에서 출국해서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오키나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일본은 이전에도 와본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오키나와는 본토보다 좀 더 관광객에게 익숙하고 살짝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키나와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었다.

현장학습을 간 곳을 전부 적을 수는 없지만, 치비치리가마, 히메유리 탑 그리고 평화기념공원이 제일 인상이 깊었다. 이 세 곳은 전부 오키나와 전투와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치비치리가마는 당시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장소였다. 히메유리 탑은 국가의 폭력에 희생당했지만, 이런 희생을 등에 업고 당시 기득권층에게 면죄부를 주는 장소였고 평화기념공원은 오키나와인들 스스로 기존의 일본에 있었던 폭력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기위해 노력하려는 것이 보이는 장소였다.

오키나와는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독특한 곳이었다. 류큐 왕국이후 일본에 강제로 통합되어 태평양 전쟁 때는 일본의 방패막이 되어서 전쟁의 피해를 겪은 곳이었다. 거기에 일본 국가의 폭력에 피해를 당한 곳이기도 했다. 이번 해외현장학습을 오지 못했다면 나는 오키나와를 그저 관광과 휴양을 위한 섬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런 폭력은 이제 동물들을 향하고 있었다. 돌고래쇼를 보고 있었을 때, 이 돌고래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돌고래를 가두고 힘들게 했을 것을 생각하니 아직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장학습이라는 학습을 위한 목적으로 갔지만, 평소 여행을 갈 때도 가벼운 마음으로 가는 것 보다는 그곳이 겪었던 역사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해외현장학습을 마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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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秦昰旅行記(사학과14 박진하)

秦昰旅行記(사학과14 박진하)

진이라는 나라는 오랜 기간 나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우리나라의 고대국가도 아닌 중국의 고대 국가가 나에게 감동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처음 진을 알았던 그 때부터 진의 이야기라면 눈이 가고 시황제의 이야기라면 귀가 갔다. 그래서 이번 하계 해외현장학습의 목적지가 진시황제의 ‘서안’임을 알았을 때 나는 안 갈수가 없는 마음이 되었다. 현장학습이 끝나면 진에 대한 감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현장학습을 기다렸다. 현장학습이 가까워질수록 직접 진시황을 마주치는 것 같은 기대감도 천천히 커져갔다.

이번 하계 현장학습에서 다룬 진의 유적은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그리고 진시황의 지하궁전이다. 출발하기 전 먼저 둘러볼 유적과 박물관 등을 설명하는 책자를 현장학습에 참여하는 인원이 제작하였다. 내가 현장학습에 참여한 목적이 진시황릉에 가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책자에 실린 내 글 역시 진시황릉과 지하궁전에 대한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 나는 내가 오랜 기간 관심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이미 아는 것을 바탕으로 즐겁게 글을 쓸 것이라 생각했고 자료 또한 많아서 수월하게 글을 완성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즐겁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이었으며, 진시황릉에 대한 연구는 병마용갱을 제외하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서 자료도 많지 않았다. 심지어 능의 크기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능의 크기를 추측하는 글을 보았을 땐 과연 글을 완성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완성된 글의 내용은 지금까지의 연구보다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지하궁전의 모습과 진시황제에 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쓰면서 자꾸 억울한 마음과 함께 중국이 진시황릉의 연구를 아직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글을 완성하고 나서도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아 이에 대해 알아보는 중 느린 진시황릉의 연구의 진행이 서안의 기술력 부족 때문이라고 하는 글을 보았다. 아마 진시황릉은 중국의 소중한 보물단지와 같아서 쉬이 뚜껑을 열어보지 못 하나 보다. 그리고 지금 파헤쳐서 제대로 연구를 못 하는 것보다 미래의 더 발전된 기술로 발굴을 하는 것이 진시황릉을 연구하는 것에 있어서는 더 좋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는 진시황릉에 관한 발굴이 많이 진행되어서 나중엔 진시황릉을 직접 들어가보고 싶다.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지하궁전의 방문은 중국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한국보다 훨씬 더운 날씨에 잠도 부족했지만 어서 빨리 병마용을, 그리고 진시황을 만나고 싶었다. 오전의 일정을 끝내고 드디어 나는 「사기」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는 지하궁전에 발을 딛었다.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의 지하궁전에는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과 화살, 강과 산, 별과 달 그리고 꺼지지 않는 초가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지하를 깊게 파내는 것도 어려운데 그 안에 강과 산을 만들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을 말 그대로 궁전처럼 만든 것은 죽음 후의 세계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어서도 ‘황제’로 남기 위해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는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서 머물 곳을 화려하게 짓는다면 죽어서도 황제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자본과 많은 노동을 투입하여 몇천년이 넘은 지금도 경탄이 나오는 무덤을 만든 것이 아닐까.

진시황의 내세관을 생각해보며 나는 지하에 축조된 지하궁전으로 들어갔다. 지하궁전으로 이어진 복도의 그림들은 나를 정말로 진시황의 지하궁전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지하궁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지하의 탁 트인 공간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높은 산과 하늘에 박혀있는 별이었다. 그리고 바다와 강으로 보이는 모형 한 가운데에 산의 높이에 다다르게 놓여진 관은 이 지하궁전의 주인공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실 기대에 못 미치는 완성도를 보이는 지하궁전이었지만 그래도 「사기」의 내용은 거의 표현된 것 같았다.

지하궁전을 뒤로하고 진시황릉 중 그나마 발굴이 많이 이루어진 병마용갱으로 향했다. 사실 가장 가장 많이 기대했던 곳이 바로 병마용갱이었다. 진시황릉의 유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병마용이기도 하며 심지어 서안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것 역시 병마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착한 순간부터 계속 병마용을 생각했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언제 병마용을 갈지, 이동을 하면서도 병마용의 순서는 아직 멀었는지 계속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서인지 마침내 병마용갱으로 가는 때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병마용은 무덤부장품의 일종으로 흙으로 빚은 인형이다. 원래 고대에 있던 장례풍습인 ‘순장’은 죽은 자를 위하여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시종들을 무덤에 함께 묻는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의 무덤은 사람을 직접 묻지 않고 대신 흙인형을 묻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다 고대엔 노동력이 귀중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묻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진시황의 사후를 위한 병마인 병마용은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개수가 매장되어 있다. 갱의 개수도 여러개이며 그 갱마다 배치된 병마용의 기능 역시 다양하다. 병마용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왔다. 특히 나는 병마용의 얼굴 생김새가 일치하는 것이 없으며 크기조차 일반인에 비해 크다는 사실 때문에 병마용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었다. 어떤 방식으로 병마용을 만들었을지 상상하며 병마용갱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1호갱에 들어갔다. 바깥에서 본 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굉장히 넓었다. 그리고 수많은 병마용들이 보였다. 정말 그 광경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직접 보니 더 거대했던 병마용들이 모두 한 방향을 보고 대열을 갖추어 서있는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웅장하며 엄숙해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한동안 말을 잃고 넋놓아 바라보기만 하였다. 함께 동행하였던 이성원 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병마용들은 머리와 몸, 팔과 다리를 따로 구운 후 마지막에 몸통에 나머지를 끼워넣어 완성한다고 한다. 또, 몇몇 병마용들을 보면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처음엔 색색의 병마용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교수님의 설명을 따라 병마용들의 이모저모를 보던 중 다른 병마용과 달리 팔의 비율이 조금 이상한 병마용을 발견하였다. 교수님은 과거 진시황의 병마용들을 만들 때 장인들이 주로 병마용을 만들었겠지만 장인들만 만들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아 일반인의 손을 빌렸을 것이라고 하며 그 병마용에 대해 설명하셨다. 병마용이 전시된 양쪽 길로 이동하며 아직 복원되지 않은 병마용들도 보고 각자 맡은 것이 달라 옷의 생김새도 다른 점도 확인하며 1호갱을 나왔다.

3호갱에는 지금까지 보았던 병사들이 아닌 지도자 계급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병마용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회의하는 듯 서로 마주보고 서있기도 했고, 중심이 되는 병마용을 호위하듯 서있기도 하였다. 이 곳은 1호갱처럼 공격적인 분위기가 아니라서 군대의 긴장감은 덜하였다. 하지만 무언가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가 갱 내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3호개은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관람을 마쳤다.

다음으로 간 2호갱은 특수한 임무를 가진 병마용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특히 2호갱에서 발굴된 궤사용은 보존 상태가 좋은 것 등의 이유로 장군용과 함께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궁수용을 기대하며 2호갱으로 갔다. 2호갱은 1호갱의 병마용과 다르게 생긴 병마용이 많았다. 잔뜩 부서진 병마용들이나 완성된 병마용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동물들처럼 보이는 용들도 많았다. 2호갱에서 특히 신기했던 건 나무가 돌로 변한 것이었다. 처음엔 그냥 벽인줄 알았던 것이 과거엔 나무였고, 또 그 안에는 병마용이나 다른 흙인형들이 있을 것이라는 게 정말 신기했다. 직접 내려가서 만져보며 나무의 결이 남아있는 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한게 아쉬웠다. 2호갱을 쭉 들어가면 완성도가 높고 흔치 않은 병마용들을 따로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다. 그 곳에는 장군용과 궤사용을 비롯하여 기마병, 독특한 자세의 병사용이 있었다. 이 전시장을 처음 갔을땐 그 정교함에 한 번 놀라고, 그 크기에 다시 놀랐다. 분명 1호갱에서 병마용의 전부를 확인한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감동이 더 물밀 듯 밀려왔다. 특히 장군용은 사진으로도 많이 보았고, 길거리에서 장식품으로도 많이 보았는데 실물을 직접 보니 잠시 말을 잃을 정도였다. 흙인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품에 나는 병마용을 제작한 장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다. 한동안 그 장군용을 감상하다 이어서 궁을 쏠 준비를 하는 자세의 궤사용, 말과 함께 있는 기마병 등을 보고 2호갱을 빠져나왔다.

2호갱의 지하에는 청동마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청동마차는 두 개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진시황이 실제로 타고 다니던 마차를 만든 것이다. 진시황은 상황에 따라 마차를 바꿔 탔으며 이 두 개의 마차 중 뒤쪽에 있는 마차에서 진시황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마차와 말들, 마부는 흙으로 만들어진 병마용처럼 크기가 크진 않았지만 섬세한 것은 같았다. 특히 나는 진시황이 죽었을 것이라는 청동마차가 유독 눈에 들어와 한참을 감상하였다. 어둠 속에 전시된 청동마차. 지하의 모든 빛은 청동마차를 향해 비춰졌다. 그 빛의 가운데에 있는 청동마차는 몇 천년이 지나 많이 녹슬어 있었다. 청동마차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닫혀져 있었는데, 녹슬었기에 조금만 건들면 열릴테지만 나는 그 문이 꽉 닫혀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꽉 닫혀진 문, 그 안에서 누군가가 밖을 내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그 곳에서 진시황이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고 들었기 때문일까,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2호갱까지 감상한 후 우리는 마지막으로 진시황릉의 중심이라고 추정되는 언덕으로 갔다. 진시황릉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그곳에 관이 있는 지는 알수가 없으며 언덕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산에 가깝다. 과거에는 이 진시황릉을 오를 수 있었지만 2010년부턴 금지되었다고 한다. 오르지 못 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무덤을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게 느껴졌다. 우리는 진시황릉에 도착해서 작은 자동차를 타고 진시황릉 주변을 크게 한바퀴 돌았다. 초록 나무로 우거진 진시황릉은 산과 흡사하게 생겨서 진시황릉이 맞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손에 잡힐 듯 가까워 금방이라도 그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전히 우리는 진시황릉에 대해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아 조금 아득하게 느껴졌다. 길지 않은 진시황릉의 감상을 마지막으로 진시황과의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진시황의 무덤, 진시황의 병사들은 세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축조물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특히 진시황릉은 아직도 발굴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그 감탄이 몇 배로 커질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뜻깊은 유적인 진시황릉의 주체는 흔히 진시황이라고 여겨진다. 나 역시 과거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시황릉을 보는 것은 진시황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시황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진시황릉을 직접 확인하고 마음 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진시황을 향한 감동이 아니었다. 진시황이 아닌 진시황릉을 축조한 진의 백성들에 대한 감동이었다. 현장학습이 진행될수록 나는 진시황보다는 진의 백성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비율이 잘 맞지 않은 병마용, 모두 다른 병마용들의 생김새, 상상조차 안 되는 지하궁전의 모습……. 그들의 노력이 진시황릉의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렇다, 진시황릉은 진시황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진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직접 진시황릉을 보고 나서야 그것을 피부로 마음으로 느꼈다. 비록 그들은 강제로 동원되었던 것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진시황릉은 그들의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매우 큰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이번 현장학습으로 느낀 감동, 그리고 경외감은 그들이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진시황릉을 간다면 그때는 처음부터 그들을 염두하며 진시황릉을 감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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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중국, 서안을 걷다(사학과15 김정현)

중국, 서안을 걷다(사학과15 김정현)

누구든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쳤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중국 황하(黃河). 황하가 운반하는 최상의 진흙은 범람을 거듭하며 황하 주변의 땅을 비옥하게 하였고 이 황하의 중류 유역에 서안(西安, Xian)이 위치한다. 위에서 내려다본 서안은 북으로는 고원, 남으로는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평원으로, 황하의 여러 지류가 모여 있어 수원(水源) 또한 풍부하다. 비옥한 토지, 풍부한 수원, 자연의 장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서의 서안은 중국 고대 역대 왕조의 수도로 역할을 했다. 서주(西周)때는 호경, 진(秦)때는 함양, 그리고 한(漢)·수(隋)·당(唐)에 이르러서는 장안으로 불리면서 서안은 대륙의 중심으로 자리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에게 가장 기대되는 순간은 글로 배웠던 역사의 현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에 관심이 깊은 나로서 이번 중국 서안 방문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중국과 한국은 고대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역사·문화·경제·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기에, 동아시아의 역사를 배우면서 중국을 경시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황하의 호구폭포를 통해 중국 문명의 탄생을 엿보았고, 진·한대의 도용(陶俑)을 비교하면서 왕조의 흥망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당대에 건립된 이슬람 사원과 명대의 성벽 위를 걸었으며, 의외의 공간에서 중국 근현대의 역사적 장면을 마주했다. 2016년 무더운 여름, 하계 해외현장학습을 통해 선사 황하 문명부터 근현대시대까지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중국 서안을 눈에 담았다.

 1. 중국 문명의요람 <황하 호구폭포 & 반파박물관>

호구폭포는 황하의 여러 지류(支流)가 한데 모이는 곳으로, 황하의 격동적인 움직임과 거대함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일행은 숙소가 있는 서안 시내에서 호구폭포까지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 도착했다. 서울에서 한반도 최남단인 해남까지 왕복 9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얼마나 광활한지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황하를 본다는 기대감과 ‘강물이 얼마나 누렇길래 이름까지 황하일까?’라는 의구심을 안고 호구폭포를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실제로 마주한 황하는 내가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황하의 물줄기는 누렇다 못해 거무튀튀했으며, 마치 초콜릿이 강을 이뤄 꾸덕꾸덕 흐르는 듯했다. 위 지평선으로부터 황하의 지류들이 한 대모여 엄청난 광음을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호구 폭포 밖에 작은 웅덩이에 진흙물이 고여 있어 들어 올려보니, 진흙이 손가락 사이로 흐를 정도로 흙의 입자가 곱고 부드러웠다.

최양질의 진흙이 흐르는 이 황하를 따라 다양한 선사 문명이 누층적으로 발전했다.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점은 앙소문화와 그의 토기이다. 다음으로 방문한 <반파박물관>은 선사 유적지 박물관으로, 앙소문화의 대표적 유적지인 반파촌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신석기 시대의 여러 유물 중에서도 역시 눈에 띄는 것은 당연 토기였다. 한국의 선사 문명의 토기는 표면이 거칠다면, 황하가 운반한 고밀도 진흙으로 빚어진 토기의 표면은 부드럽고 윤기가 났다. 그 위에 그려진 물고기 무늬는 아마 선사인(先史人)이 황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형상화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2. 중국 황제의 무덤 <병마용갱 & 한양릉박물관>

이번 하계 해외현장학습에서 가장 기대했던 일정이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이었는데, 한양릉 (漢陽陵)박물관과 함께 비교해 관람하면서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병마용 갱은 죽은 진시황제를 사후에서도 지키기 위해서 제작된 지하 궁전의 군대이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을 진시황제와 함께 묻을 수 없기에 흙으로 실제 사람의 크기로 빚었는데, 그 사실적인 표현과 거대한 규모로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병마용 갱을 둘러 싼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나는 병마용을 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병사의 지위에 따라 동작과 복장, 나아가 머리 스타일까지 제각각이었고, 얼굴의 골격과 모양에 따라 병사의 출신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었다. 가장 크고 많은 병마용을 갖추고 있는 1호 갱의 전면에 섰을 때, 거구의 병마용 군대가 마치 나를 향해 진군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그때의 기분을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흙으로 빚은 인형인 도용(陶俑)은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나는 진(秦) 다음으로 건국된 한나라의 도용들을 보기 위해 <한양릉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한양릉은 한나라 초기의 제 6대 황제인 경제(景帝)와 황후 동영의 합장릉이다. 이곳에서는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과는 또 다른 도용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시황제의 병마용은 군대의 모습을 실제 사람의 크기로 제작되어 근엄하고 엄격해 보인다면, 한양릉의 도용은 그의 1/3 크기로 인형과 같은 모습의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인다. 또한, 병마용에서는 병사와 전투용의 말에 한정되는 군사적인 모습만 확인할 수 있지만, 한양릉에서는 여성, 가축, 동물도용 그리고 생활 토기 등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제의 병마용과 한양릉의 도용의 모습에는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과 만리장성 건설 등의 대규모 사업은 곧 백성들의 몫이자 고통이었다. 백성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무거운 부역에 참여해야 했고 엄청난 세금이 동원되었다. 결국, 진시황제 사후 백성들의 불만이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으로 표출되었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멸망과정을 지켜본 한(漢)의 지배계층은 멸망의 요인을 답습하지 않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나라의 도용이 진나라의 병마용에 위세가 눌리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3. 세계제국 당나라를 만나다 <청진대사>

역사를 배우는 데 있어서 종교는 필수불가결한 부분인데, 이는 종교가 한 명의 사람을 뛰어넘어 집단의식과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의 사례를 보면 무슬림은 자신의 일평생 이슬람의 5대 의무를 수행하며 쿠란의 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이처럼 종교는 인간의 정신적 안식처인 동시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형성하고 제한한다.

때문일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종교를 둘러싸고 잦은 전쟁과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 당나라만큼은 달랐다. 당 왕조는 중국 전통 왕조들 중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왕조였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외국의 문화와 문물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지금의 서안)으로 집중되었다. 외국인과 함께 네스토리우스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이교도가 함께 전래하여 당 제국으로부터 다양성을 인정받았다.

나는 당 왕조 때 건립된 이슬람교의 사원인 청진대사(淸眞大寺)를 방문했다. 청진대사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건축된 이슬람 사원으로, 당 현종 천보1년(742)에 건설되어 지금으로부터 1,3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까지도 청진대사는 중국의 무슬림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슬람의 지식을 전수하는 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 청진대사에서는 둥근 돔과 모스크와 같은 현재 이슬람의 건축양식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불교 사원인가 할 정도로 의심할 수 있는데, 이는 이슬람의 건축양식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대의 무슬림들이 중국의 전통양식을 본떠 축조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청진대사에서는 이슬람의 문화와 당대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청진대사의 예배당의 지붕은 돔을 대신해 푸른빛이 감도는 기와가 얹혀 있고,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동아시아의 건축양식을 띄고 있었다. 반면 교회나 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조각상이나 인물화를 찾아볼 수 없었고, 예배당은 동서로 길쭉하게 뻗어있다. 이는 이슬람에서 신을 인간·동물로 그림이나 조각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금기이고, 알라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율법에 근거해 예배를 드릴 때도 자리에 위계를 따지지 않고 ‘ㅡ’자로 나란히 서는 이슬람인의 문화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당 왕조의 국제성은 예술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앞서 방문한 <섬서 역사 박물관>과 <한양릉박물관-특별전>에서 쉽게 당삼채를 만날 수 있었다. 당삼채는 당 제국(618~906)의 도기로, 주로 당시 귀족들의 장례용으로 제작되어 묘릉에 부장되었다. 남녀의 인물상에서부터 신상, 진묘수, 그리고 각종 명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당대 귀족의 생활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 중 서역인의 모습을 당삼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리부리한 눈과 큰 코, 이국적인 형상의 당삼채는 당나라과 장안이 세계제국이자 국제도시임을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4.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서안성벽>

서안을 돌아다니면 자주 서안성벽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서안 시내의 중심에 서안 성벽이 있기 때문이다. 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되었는데 본래 당나라 장안황성의 기초 위에 성벽을 올렸고, 그 이후에도 수차례의 공사를 걸쳐 방어체계를 구축했으며, 현존하는 중국의 성벽 중에 보존상태가 가장 뛰어나다.

서안성벽은 우리나라의 수원화성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서안성벽과 수원화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성벽을 구성하는 형식에 있다. 서안성벽은 성벽 기초부터 그 위의 전각까지 모두 흙으로 구운 작은 벽돌들을 촘촘히 쌓아 올린 데에 비해, 수원화성은 1m에 달하는 큰 화강암으로 성벽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작은 벽돌로 쌓아 올렸다. 서안은 질 좋은 진흙이, 한반도는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함으로 두 성벽 다 주변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적절하게 성벽을 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서안성벽은 직사각형의 형태로 서안 시내의 중심을 감싸고 있으며 전체둘레가 무려 13km에 이른다. 서안성벽을 따라 서안 시내의 모습을 천천히 보고 싶었지만, 땡볕 아래에서 그 길을 걷기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전거 대여가 가능하다고 하니 자전거로 서안성벽 위를 달려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서안성벽 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과거와 현대의 조화’였다.

명대에 지어진 성벽 위에서 높은 빌딩으로 가득 찬 서안 시내를 바라봤다. 서안성벽의 내부와 외부 모두의 공간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어서 안과 밖을 자유롭게 통행하는 버스와 사람들이 보였다. 옛 건물과 그 너머에 보이는 현대식 건물들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규모와 역사적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고, 현대와 과거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서안성벽은 곧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날이 멀지 않다고 느꼈다.

5. 중국의 중세와 근대가 공존하는 역사적 공간 <화청지>

화청궁(華淸宮)으로도 불리는 화청지는 본래 온천으로 유명한 곳으로, 여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주나라 때부터 이곳에 왕실의 별장이 만들어졌고, 이후 진·한·수나라를 걸쳐 당나라 현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화청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하다. 당 현종은 통치 말까지 양귀비와 화청지에서 머물었기 때문에, 당 현종과 양귀비가 이용했다는 욕탕이 남아 있다.

한편 화청지는 당 후기 안사의 난으로 현종이 궁을 버리고 피신하자 점차 황폐해져 갔지만, 근대에 들어서 다시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공산군 토벌을 위하여 섬서성 서안에 주둔 중인 장쉐량과 휘하의 만주군이 독전(督戰)을 위해 경내의 오간청(五間廳)에서 머물던 장제스를 구금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을 결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對) 일본 전쟁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제2차 국공합작’을 타결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긴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역사의 현장을 한 공간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너무 넓어서 입구에서부터 한참 헤맨 끝에 발견한 화청지 욕탕. 역시나 붐비는 관광객들의 물결에 휩쓸려 허둥지둥 관람할 수 밖에 없었다. 당현종의 연화탕(蓮華湯), 양귀비의 해당탕(海棠湯)과 더불어 관리들의 욕실인 상식탕(尙食湯), 태자탕(太子湯)등 여러 욕탕이 있다. 현재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보보경심;려>에서 나오는 다미원의 욕탕의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욕탕 뒤로 넘어가서 많은 전각들 사이에 있는 오간청(五間廳)을 찾았다. 오간청을 둘러싸고 있는 벽면에 제2차 국공합작의 과정과 관련 인물들의 설명이 부착되어 있고, 오간청의 벽면의 총탄 자국은 그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말해 주는 듯 했다.

하계 해외현장학습을 마치면서

앞서 소개했던 방문지 이외에도 섬서성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섬서 역사 박물관>, 한나라 무제의 대외업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릉 박물관>, 중국 불교 최대의 성지인 <법무사>, 비석으로 이루어진 <비림 박물관> 등등 서안의 이곳저곳을 방문했는데 함께 소개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비단 A의 역사가 A만의 것으로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여러 국가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는데, 대부분 비슷한 맥락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잘못을 거듭하지 않기 위한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마치 서안성벽에서 수원화성이 떠오르는 것처럼 의외의 곳에서 자국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나 중국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동아시아에 미치는 영향력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이번 하계 해외현장학습을 통해서, 한반도를 벗어나 동아시아 유교·불교·한자 문화권의 중심이 되었던 중국을 살펴보았다. 중국은 ‘대륙’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어디를 가든지 거대하고 웅장했다. 중국 음식을 직접 먹어보니 왜 중국인이 ‘차(茶)’를 사랑하는지도 깨달았고, 온종일 사람으로 가득 찬 거리를 걸어보니 중국인들이 왜 목청이 높은지도 짐작이 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중국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바를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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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드는 사람 - Hewlett Packard Enterprise 기업...

손을 드는 사람
- Hewlett Packard Enterprise 기업 방문 수기

 휴렛팩커드와의 첫 인연은 코어사업단의 커피톡 멘토링에서 시작되었다.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시는 분들의 멘토링이라고 하여 한국과는 어떤 점이 다를지 기대가 되었다. 멘토링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시작 전 온인선 팀장님께서 보여주신 동영상이었다. 어떤 내용을 시사하고 있는지 학생들에게 물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이 손을 들고 도움을 청했기에 변화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2시간 동안 학생들의 질문에 성심 성의껏 답해 주셨다.
 나도 모르게 지방대 학생이라는 생각으로 나의 가능성을 낮추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멘토링 내내 동기부여가 되었고 외국계 기업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느꼈다. 두 분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우리들의 이야기에 경청해 주셨고 진심으로 조언해 주셨다. 멘토링이 끝난 후 이런 생각들을 눌러 담아 감사의 연락을 드렸더니 팀장님께서 회사로 초대해 주셨다.

 평소 여의도를 지나다니며 높은 빌딩 안에는 누가 일을 하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감사하게도 회사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좋았던 점은 직접 느낄 수 있던 회사의 수평적이지만 체계적인 문화와 한국기업과의 구조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저녁 식사 때는 전중훤 전무님과 박대범 부장님께서 오셔 함께 면접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커피톡 멘토링과는 다르게 조금 더 편한 분위기 속에서 평소에 관심 있었던 직무와 사회공헌분야 같은 부분도 여쭤볼 수 있었다. 면접을 대비해서 답변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친구들과 논리적으로 이야기 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기소개서에는 과거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회사에서는 미래에 함께 일 할 직원을 뽑는 것이므로 미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면 더욱 좋다고 하셨다. 직무 부분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선배로서 얘기를 많이 해주셨기 때문에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고충에 대해 조언을 얻을 수 있어 더욱 뜻 깊은 시간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팀장님께서 보여주신 동영상처럼 우리는 손을 들어서 기회를 만들었고 이번 만남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도 계속 손을 들어 도움을 구하고 배울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갈 것이다. 흔쾌히 시험이 끝나고도 다시 방문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해 주셨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팀장님, 전무님, 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또한 소중한 인연을 만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신 코어사업단 교수님들께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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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에서 온 편지-LG Chem (철학과 서예원)

안녕하세요. 저는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에 재학중인 서예원 입니다. 
  
  저는 2016년 9월부터 2017년 2월, 6개월간 LG화학 독일 법인의 전기차 배터리 마케팅 부서에서 인턴십 활동을 하고있습니다. 4학년 2학기에 본 프로그램을 다녀 온 거라 취업 준비가 눈앞에 닥친 때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인턴 활동은 미리 사회를 경험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직원이 아닌 오히려 인턴이기에 한발짝 떨어져 회사 환경과 생활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모든 일에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회사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함께 마케팅 부서에서 일한 과장님, 부장님께서 누누이 하시는 말씀이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회사에서는 결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조언을 해주셨던 어떤 차장님께서는, 한 개인의 직무 능력이 뛰어난 것 보다 다른 사람과 소통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내며 회사에서도 선호한다고 하신 것이 가장 생각에 남았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회사지만 일단 한국 회사이기에 업무의 대부분이 영어(저는 독일어를 하지 못하고, 현지 채용인 들을 제외하고는 주재원분들도 영어로 소통을 합니다)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것 외에는 한국의 직무 환경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인들 간에는 상하관계가 분명했지만, 독일인과 한국인 혹은 독일인과 독일인 사이에서는 상하관계를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습니다. 마트나 음식점, 역 어디를 가든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그래도 독일어를 알았더라면 훨씬 생활이 편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한번, 인턴으로 한번 간 적이 있는데, 그 때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고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며 살아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생활하며 처음으로 해외거주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언어의 장벽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거의 제 인턴 생활이 막바지에 이르렀기에 새로운 인턴을 모집하고있으며, 채용 담당자인 과장님과 함께 이력서를 보고 지원자들과 전화면접하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력서에 오타가 있거나 회사명을 잘못 적으면 더 보지도 않고 바로 종이에 X자가 쳐집니다. 가령 저희 회사는 LG Chem인데, LG Chemical이라고 적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회사명을 틀리는 실수를 누가 하나 하지만 의외로 많다고 하셨습니다. 과장님께서 일단 서류에 통과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이력서는 그저 종이에 불과하다고 하시며 첫 마디인 “안녕하세요”부터 이 사람이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할 사람인지 아닌지 느껴진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전화면접 하는 것을 함께 들으니 어렴풋이 그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틀에 박힌 상투적인 대답이나 암기한 느낌이 드는 답변을 피하기 위에 예고없이 전화를 걸어 면접을 보는 거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고, 무엇을 유의해야할 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열정적이고 자신 있는 사람은 목소리 톤부터 달랐습니다. 역시나 그랬던 분들이 면접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취업을 준비할 때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잘 활용 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해외 인턴을 생각하고 지원하려는 분들께서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이 경험을 어떻게 활용하고 나 자신을 발전시키느냐는 자기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습니다. 

 

(* 서예원 학생이 독일 생활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다양하게 보내왔습니다.)